주부가 증권회사서 훔친주식 팔려다 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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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FA 임의적용 부당해고등 피해 ***
주한미군이 한미행정협정(SOFA)상의 노무관련조항을 임의대로 적용,
미군측에 고용된 한국인노동자들이 한국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채
부당 해고등의 피해를 당하고 있어 이에대한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주한미군은 특히 한국인노동자 부당해고를 둘러싼 분규처리에 있어서도
이같은 한미행협 노무조항과 초법적인 자체 인사규정을 들어 노동부등
한국관계기관의 구제 요청, 판결등을 묵살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
비난이 뒤따르고 있다.
*** 냉동공 박정도씨가 대표적인 억울한 예 ***
이같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미8군산하 하청업체인 경기도 성남시
도야동 K-16 우유공장 냉동공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다 지지난 87년 6월
19일 해고된 박정도씨(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1동 476의29)의 경우.
박씨는 87년 3월13일 돌료직원 박현웅씨(60.전공)와 함께 암모니아를
수용탱크에 주입시키는 작업을 하다가 전공 박씨가 눈에 전치 1주의
상처를 입는 안전사고가 발생, 해고됐다.
미군측은 당시 박씨가 "냉동전문기술이 없는 전공을 불러 작업을
했으며 작업반장 한완기씨(64)의 작업중단명령을 어기고 작업을 계속하다
사고를 냈다"고 지적, 주한미군 인사규정(월권행위와 명령불복종,
동료직원에게 중상을 초래한 행정규정위반)을 들어 박씨를 해고했다.
박씨는 미군측의 해고에 맞서 곧바로 부당해고진정서를 노동부에
내는등 2년6개월간에 걸친 외로운 투쟁을 시작했으며 노동부는 자체
조사결과를 토대로 <>사고를 당한 박현웅씨가 평소 냉동공 보조역할을
해 오는등 박씨가 작업한 것은 관행상 자연스러웠다는 점 <>당시
작업반장 한완기씨의 작업중단 명령이 없었고 사고직전까지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점 <>박씨의 상처처가 1주정도임에도 중상으로 간주된
점 등을 들어 87년 8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5차례에 걸쳐 미군측에
구제요청을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측은 사고 당일 작업반장 한씨가 보고한 내용을
유일한 증거로 간주, 박씨에 대한 노동부의 구체요청을 계속 묵살해
왔다.
박씨 해고문제는 노동부가 뒤늦게 외무부를 통해 SOFA 한미합동위원회에
조정을 의뢰, 한미 합동위원회의 의제로 채택됐으나 박씨가 복직될
가능성은 희박한 형편이다.
보증금 70만원, 월세 6만원의 사글세방에서 6남매의 가장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박씨는 "외국기관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국내에 살면서도 국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이 한미행정협정(SOFA)상의 노무관련조항을 임의대로 적용,
미군측에 고용된 한국인노동자들이 한국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채
부당 해고등의 피해를 당하고 있어 이에대한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주한미군은 특히 한국인노동자 부당해고를 둘러싼 분규처리에 있어서도
이같은 한미행협 노무조항과 초법적인 자체 인사규정을 들어 노동부등
한국관계기관의 구제 요청, 판결등을 묵살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
비난이 뒤따르고 있다.
*** 냉동공 박정도씨가 대표적인 억울한 예 ***
이같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미8군산하 하청업체인 경기도 성남시
도야동 K-16 우유공장 냉동공으로 30년 가까이 일하다 지지난 87년 6월
19일 해고된 박정도씨(6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1동 476의29)의 경우.
박씨는 87년 3월13일 돌료직원 박현웅씨(60.전공)와 함께 암모니아를
수용탱크에 주입시키는 작업을 하다가 전공 박씨가 눈에 전치 1주의
상처를 입는 안전사고가 발생, 해고됐다.
미군측은 당시 박씨가 "냉동전문기술이 없는 전공을 불러 작업을
했으며 작업반장 한완기씨(64)의 작업중단명령을 어기고 작업을 계속하다
사고를 냈다"고 지적, 주한미군 인사규정(월권행위와 명령불복종,
동료직원에게 중상을 초래한 행정규정위반)을 들어 박씨를 해고했다.
박씨는 미군측의 해고에 맞서 곧바로 부당해고진정서를 노동부에
내는등 2년6개월간에 걸친 외로운 투쟁을 시작했으며 노동부는 자체
조사결과를 토대로 <>사고를 당한 박현웅씨가 평소 냉동공 보조역할을
해 오는등 박씨가 작업한 것은 관행상 자연스러웠다는 점 <>당시
작업반장 한완기씨의 작업중단 명령이 없었고 사고직전까지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점 <>박씨의 상처처가 1주정도임에도 중상으로 간주된
점 등을 들어 87년 8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5차례에 걸쳐 미군측에
구제요청을 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측은 사고 당일 작업반장 한씨가 보고한 내용을
유일한 증거로 간주, 박씨에 대한 노동부의 구체요청을 계속 묵살해
왔다.
박씨 해고문제는 노동부가 뒤늦게 외무부를 통해 SOFA 한미합동위원회에
조정을 의뢰, 한미 합동위원회의 의제로 채택됐으나 박씨가 복직될
가능성은 희박한 형편이다.
보증금 70만원, 월세 6만원의 사글세방에서 6남매의 가장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박씨는 "외국기관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국내에 살면서도 국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