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실시를 놓고 우리경제는 아직도 비싼 시행착오과정을 밟고
있다.
역설적이라고 들릴 수도 있겠으나 금융실명제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함정은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제도라는 점에 있는것 같다.
금융자산에서 나오는 이자나 배당소득과 매매차익에는 세금이
부과되고 금융자산의 증여나 상속에 대해서도 세금이 매겨진다.
그렇다면 금융실명제는 너무나 당연한 제도이다.
비실명금융자산은 필경 세금을 포탈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일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고 적은 차이는 있으나
그것 자체가 그만큼 물질적 여유가 있음을 뜻한다.
여유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세금을 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어긋난다는 논리도 성립 안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명제는 더욱 뚜렷한 명분을 갖게된다.
이런 분명해 보이는 논리와 맞닥뜨리면 가장 맥을 못추는 사람이 지식인
이다.
지식인들은 정부 학교 연구기관 뿐만 아니라 기업체나 농촌에도 많이
있다.
지식인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에 관한 판별을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금융실명제 이야기가 나오면 두말할 것 없이 당장 실시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게된다.
그런데 최근에우리는 아무리 옳은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틀린 방법을
써서는 일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는 하나의 뚜렷한 사실을 경험
하였다.
전세계약 기간을 종전의 1년에서 법을 개정하여 2년으로 연장하자
전세금이 갑자기 몇할씩이나 급등한 일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법을 제정하고 기세를 올렸던 사람들이 풀이 죽게 되었다.
세입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효력만 냈기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데는 아무리 그 취지가 정의롭더라도 두가지
면에서 여유를 배려해야 한다.
시간적 말미를 주어야 하고 그와 함께 퇴로가 될만한 다른 금융자산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내년 1월부터 실시한다면 시간이 너무 없다.
예를 들어 주식만 하더라도 시가총액이 약 95조원에 이른다.
그중에 약25%만이 대주주의 지분으로 공칭되고 있지만 대주주의 몫은
실제로는 45-50% 에 이른다는 것이 공공연한 추정이다.
그렇다면 1년사이에 25-30조원의 주식이 대주주로부터 소액주주에게로
팔려야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실현 가능한 이야기가 못될 것이다.
더구나 당면한 경기국면은 스태그플레이션에 깊이 빠져있다.
단 몇백만원이라도 저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어쩔줄을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각자의 귀중한 저축이 하루가 멀다하고 가치가 줄어드는
것을 피할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고민이다.
사회정의의 문제만 쳐다보다가 사회생존을 그르칠 수도 있다.
마땅한 투자 대상물도 없다.
금융실명제는 옳다.
그러나 그 실시에는 3-4년 더 여유기간을 주고, 대주주의 처분물량을
상속세가 훨씬 가벼운 장기금융채등을 대상으로 하여 금융기관이 사뒀다가
시간을 두고 일반에게 분매하는 것등도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