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일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5주년을 맞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요치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외교정책
- 동구각국에 대한 불간섭정책을 선언함으로써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등
동유럽에 엄청난 변혁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 핵전쟁 발발 가능성의 공포와 유럽및 중국에 대한 소련의 선제공격
우려를 현저히 불식.
- 국방비를 삭감하고 병력 50만명과 탱크 1만대 감축을 일방적으로
선언.
- 중부유럽 주둔 병력의 철수를 미국과 잠정적으로 합의
- 미국과 중거리핵미사일 폐기를 합의한데 이어 오는 90년까지 장거리
핵미사일도 절반으로 삭감한다는 목표로 협상중.
-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 11만 5,000명을 철수.
-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기본정책을 대결에서 "보편적인 인가가치"를
완수하기 위한 협력으로 전환.
- 앙골라, 나미비아, 캄보디아, 니카라과등 분쟁국에 대해 협상을
종용.
<> 민주화
- 지난 89년 경선제를 도입하고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지도부를 설득, 동의를 얻어냄.
- 강력한 대통령제 도입을 제안.
- 언론, 집회, 종교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등을 법으로
보장하겠다고 약속.
- 정치범 수백명을 석방하고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에 대한 탄압을
종식.
- 아직 법개정을 하지는 않았으나 출입국을 대폭 자유화.
<> 경제정책
- 일반시민들의 일상생활과 생활수준 개선을 위한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
- 당지도부가 공장의 개인소유제도를 받아 들이게 하는데 성공.
- 개인이 토지를 임대차하는 것은 물론 이 권리를 상속할 수있도록
법을 개정했으나 개인의 토지소유는 거부.
- 합작을 통한 외국자본의 유입을 대폭 완화.
- 90년도 적자가 1,500억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함으로써 재정적자를
처음으로 공개.
<> 국내정책
- 발트해연안 3개 공화국의 독립요구운동을 묵인.
-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등 일부 공화국에서 민족분규가 발생해
진압군 수십만면을 파견.
- 관료들의 부정 근절 실패. 폭력범죄도 계속증가.
- 환경보호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환경 개선에는 아직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음.
- 주택문제를 해겨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성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음.
- 음주가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해소하기 위해 주세수입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주류생산을 대폭 감축.
<> 고르바초프 경력 <>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오는 11일 취임 5주년을
맞이한다.
다음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주요 경력이다.
# 31년 3월 2일 = 러시아공화국의 남부에 있는 스타프로폴 지방의
프리볼로에 마을에서 출생.
# 50년 =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모스크바대학 입학.
# 54년 = 동창생 라이사 막시모브나 티토렌코와 결혼.
# 55년 =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지역 공산청년동맹 (콤소몰)운영에 투신.
# 60년 = 그타크로폴 지역 콤소몰 제 1서기에 임명된.
# 66년 = 스타브로폴 시 공산당 서기장으로 승진, 3년뒤 공산당 중앙위
정위원이 됨.
# 71년 = 소련최고회의 의원으로 선출.
# 78년 = 당중앙위 농업담당 서기로 임명돼 모스크바로 이주.
# 79년 =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
# 80년 = 정치국 정위원으로 승진.
# 85년 3월 11일 = 콘스탄틴 체르넨코사망 직후 당서기장으로 피선.
# 86년 = 소련어로 개방과 자기비판을 의미하는 "글라스노스트"와
재건과 개혁을 뜻하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적극적
으로 개혁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유배에서 석방.
# 87년 = 미국을 방문,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 양측의 "중거리 핵무기
폐지협정"에 조인.
# 88년 = 스탈린이 개혁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소집한 이래 처음으로 특별당
대회 (전소련당협으회)소집. 12월 소련최고회의 해체, 인민대회와 새로운
최고회의로 개편.
# 89년 =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 90년 = 공산당 일당독재 종식. 강력한 대통령제 신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