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인도네시아는 경제협력확대를 위해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키로 하고 31일 가서명했다. 양국 협정은 우리측에서 외무부의 최대화 국제경제국장, 인도네시아 측에서 코엔 타소 외무부국제경제국장이 각각 가서명했는데 양측은 지난 29일부터 30일까지 외무부회의실에서 실무협상을 벌여왔다.
라이엇게임즈(한국 대표 조혁진)가 국외소재 문화유산 ‘경복궁 선원전 편액’의 국내 환수 성공을 도왔다고 3일 밝혔다. 조선 왕실 유물인 ‘경복궁 선원전 편액’은 역대 왕들의 어진(초상화)을 봉인하고 의례를 지내던 선원전에 걸리는 현판이다. 일본으로 넘어갔던 해당 문화유산은 라이엇게임즈의 지원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경복궁 선원전 편액은 오는 27일 오전 10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실물을 공개한 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체계적으로 관리될 예정이다.경복궁 선원전 편액은 라이엇 게임즈의 지원으로 환수에 성공한 7번째 국외소재문화유산이다. 앞서 라이엇 게임즈는 ▲석가삼존도(2014년)를 시작으로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 책봉 죽책(2018년) ▲척암선생문집책판(2019년) ▲백자이동궁명사각호(2019년) ▲중화궁인(2019년) ▲보록(2022년)까지 총 6차례 국외소재문화유산 환수를 지원했다.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지난해 일본 현지 네트워크를 통해 경복궁 선원전 편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전문가의 평가와 조사, 실견 등을 진행했다. 소장자 측에 경복궁 선원전 편액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당위성을 전달하고 설득했으며 라이엇 게임즈의 후원을 받아 마침내 국내로 들여올 수 있었다.선원전은 조선 왕실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전(殿)’ 으로, 당시 통치 체제의 근본이었던 충(忠)과 효(孝)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경복궁 선원전 편액은 왕실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전문가들은 역사적 정황과 관련 문헌 기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번에 환수한 문화유산을 재건(1868년) 경복궁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24년간 수감 생활을 했던 김신혜 씨(47)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출소했지만 심각한 망상 증세를 보이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는 근황이 전해졌다.김 씨의 정신 상태는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지난 1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김 씨가 심각한 망상 증세를 보이며 현실과 단절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방송에서 김 씨는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이 애타게 찾아온 후계자이며, 러시아 황실의 주인이자 여러 왕실의 핏줄"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인 친부에게 납치되어 이곳에 오게 되었다며 황당한 주장을 이어갔다.또한 "진짜 동생은 정신병원에 갇혀 죽었고, 지금 남아 있는 동생은 가짜"라며 친동생 후성 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후성 씨는 "누나가 망상이 심해 나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실제로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녹취록에서도 김 씨는 "왜 나를 가둬두려 하냐", "중국 사람이랑 한국 사람을 바꿔치기하려 한다" 등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반복했다.김 씨는 심지어 자신이 '전 세계 단 한 명뿐인 스페셜 에이전트'이며, 자신이 겪은 재판 등 모든 것이 연극이었다고 믿고 있었다.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교도관은 "김 씨가 독방을 고집하면서 망상이 심해졌다"고 전했다. "2015년부터 '재심 재판에 집중하고 싶다'며 독방 생활을 계속했다"고 설명했다.이효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김 씨가 오랜 감옥 생활과 재심을 기다리며 불안이 커졌고, 고립 속에서 자신만의 판타지를 구축한 것"이라며 "모든 불운한 일을
귀의 일부를 자른 고흐는 피를 흘린 채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됐다. 의식을 되찾자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대며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완충재가 덧대어진 벽, 빗장 걸린 창문, 족쇄 달린 침대가 있는 독방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입원 초기에 의사들은 그의 자해와 이상 행동의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일부는 정신병원 입원을 제안했으나 우선 응급 치료에 노력을 다했다.병원을 잠시 방문했던 테오는 고흐의 이런 상태를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을 터놓을 한 사람만 있었어도 이 지경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테오의 말처럼 고흐 곁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위로해 줄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불안과 소외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타면서 발작과 창작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사이 「별이 빛나는 밤」(1889)을 완성했다.거듭된 피해망상고흐는 아를의 병원에서 젊은 의사 펠릭스 레이 박사를 만났다. "일반적 섬망(譫妄) 증세를 보이는 극심한 조증”이라는 공식적인 진단을 받았지만, '일종의 뇌전증' 증상도 보인다는 견해를 들었다. 뇌전증은 발작과 함께 환각을 동반한 자해가 있다고 했다. 당시 프랑스에는 5만 명의 뇌전증 환자가 있으며 고작 4000명만 입원 중이라고 했다. 이 대화 직후 고흐는 자해에 대한 삼한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귀의 상처만 치료받고 두 주 만에 퇴원했다. 그러나 새롭게 출발하려고 노력했지만, 의욕만 앞설 뿐 반복된 발작으로 다시 입원했다.병원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고흐는 아를의 노란 집에서 홀로 지냈다. 그러다 이내 이웃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고흐가 예측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