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정원식총리서리는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서
해주동중을 졸업한뒤 월남,서울대 사대를 졸업한 교육학자 출신.
30대 초반이던 4.19직후 당시 교육학자인 오천석문교장관 비서관과
장학관으로 10개월정도 문교부에 몸을담은 이래 모교강단에서 27년간
봉직한후 88년 12월 제30대 문교장관으로 입각,지난해 말 물러날때까지
2년1개월동안 재직함으로써 역대 문교부장관중 4번째 장수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제자들 사이에 ''매를 들줄 아는 스승''으로 널리 알려진 정총리서리는
문교장관 재직기간중 전교조 사태와 세종대 사태등이 발생하자 직접 현장을
방문, 수습책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자세등이 노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된 동기인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특히 장관재직시절 ''교육의 본질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교육의 민주화와 초.중.고의 교육환경 개선사업등을 적극 추진, 교육
내실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총리서리는 지난 70년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주민들과의 단결과 친선을 위해 ''화곡동주민
가족잔치''를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는 화곡동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지난 79년 모일간지에 ''머리를 써서 살아라''는 제목으로 유태인
가정교육을 소개한후 나중에 이를 단행본으로 발간, 수십만권이 판매됐다.
정치적인 감각과 함께 뛰어난 화술과 비상한 기억력을 갖췄다는 평을
받고있는 정총리서리는 전교조문제로 교단을 떠난 해직교사들로 부터 참
교육을 외면했다는 지적을 받고있는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
이와는 달리 교육부 관리들은 " 정총리 서리의 흠을 들자면 매사에
낙관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것" 이라고 말했다.
역대 문교부장관출신 가운데 김상협 총리에 이어 두번제로 재상자리에
오른 그는 부인 임학영여사 (60)와의 사이에 네 딸을 두었으나 올 봄
막내딸을 출가시킨후 부부만 살고있다.
매주 일요이면 부인과 함께 상도동에 위치한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
장로로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운동은 테니스가 수준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