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가 공동체안' 새정치체제로 확정...고르비-옐친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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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해온 "신연방조약안"대신 옐친이
우크라이나및 벨로루시대통령들과 합의한 "독립국가 공동체안"이
구소연방에 대신할 새정치체제로 확정됐다.
고르비-옐친간 합의에의해 내년1월1일자로 "독립국연방"이 공식
출범한다.
당초 고르비의 복안은 소련체제의 연장선위에서 개혁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옐친은 파산한 체제대신 독립국가 단위로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할 것이며 그 결과 모두가 우려하고 있는 위기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구소련체제의 기득권자들은 당연히 고르비를 지지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옐친의 생각에 동조한듯하다. 기득권층의 아성이었던 소련공산당이 붕괴된
이후 대세는 옐친쪽으로 기울어진것이다.
결국 구소연방의 영토위에는 우선 15개 독립국가가 세워지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러시아 연방공화국내 민족자치공화국들중 일부도 독립을 쟁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독립국가들은 "독립국가 공동체"내에서 대립과 공존을 계속하면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체제개혁을 계속할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 혁명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가 1989년에 이룩한 정치체제의 민주화개혁의 결과로 그 자신은
개혁추진의 주도권을 상실하였지만 바로 그 민주화 개혁의 열매중 하나인
옐친의 등장으로 개혁정책은 역사의 순리대로 계속될수 있게 되었다. 그의
보좌관인 샤흐나자로프의 말처럼 역사는 그의 업적을 호의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크게 보아 이러한 사태발전을 러시아제국사로의 회귀로 볼수는 없다.
오히려 역사적 부의 유산으로부터의 단절로 보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제국은 식민주의적 영토팽창정책을 추구하였던데 반하여 "독립국가
공동체"는 이들 피정복민족들을 위한 원상회복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다.
슬라브족 3개국가의 비중으로 보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할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유럽통합이후 통일독일이 차지할 비중이 막중하다고
하여 게르만민족사의 부활로 보는 관점이 부적절하듯이 러시아 우크
라이나및 벨로루시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한가지만 가지고 이전의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고 속단할수는 없다.
앞으로의 문제는 "공동체"내 독립국가들에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공존의 환경이 허용되는 것이다. 국익제일주의가 국가간 관계에서 불변의
외교정책인 이상 독립국가 상호간에 대결은 불가피할 것 같다. 한편
중기적 관점에서 판단하여 보면 독립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파산직전의
경제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공존의 필요성이 대결의 불가피성보다 우선시될
것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볼때 러시아군의 엘리트들은 직접 정권을 담당하려고 시도하기
보다 집권후보자중 한쪽을 지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권력브로커
였었다. 소비에트 시대에 흐루시초프의 집권을 도운 주코프원수나,브레즈
네프 시대에 군산복합체가 국가자원을 우선적으로 배정받는데 만족하여
왔던 사실은 이 전통이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
사태에서도 소련의 군부 엘리트들은 집권을 획책하기 보다 기득권의
유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리라고 판단된다.
군부엘리트를 비롯한 구 소련의 기득권층은 소련체제의 파산을 가져온
당사자들이다. 이들은 앞으로 전개될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체제개혁
과정에서 수반될 고통의 최우선적 분담자일수 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새로운 "공동체"의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민스크로 옮겨지면서 겪게될
이들 계층의 고통은 불가피할수 밖에 없다. 다른 누구보다도 소련국민들이
이것을 원하고 있다. 대중정치가인 옐친이 이러한 국민들의 욕구를
활용하여 크렘린 궁전으로부터 고르바초프를 밀어내는 수법은 가히
일품이라고 불러줄만 하다.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밀어 낸다고 하여 이 두사람의 지도자가
화해할수 없는 숙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들을 러시아 사상
유례가 드문 체제개혁 혁명의 동반자로 보고 있다.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위기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페레스트
로이카 혁명의 기치를 내세운이후 1991년8월 군사정변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는 개방화와 민주화를 통하여 구소련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옐친을 스베들로프스크의 당제1서기에서 일약 공산당
정치국후보위원으로 발탁하여 같이 손잡고 소련체제를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제 고르바초프가 추구하였던 구체제 연장선위에서의
개혁정책이 벽에 부딪친 시점에서 옐친이 개혁의 기치를 이어가는 것은
지도력의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지극히 다행스러운 사태의 발전이다.
똑같은 관점에서 옐친의 지도력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그를 대신할
지도자가 등장할수 있다면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혁명은
궁극적 성공에 한걸음 더 접근할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제국의 권위주의 정치문화위에서 탄생한 구소련체제를 한사함의
지도자가 일시에 개혁할수 있다고 믿는것은 신화가 아닌 현실세계에서는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구소련체제안에서 살아온 120여 제민족의
인민들에게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연속적 지도력은 사상 유례가 드문
행운이었다.
우리는 민주적 정치제도가 "공동체"의 인민들에게 옐친이후에도 이러한
연속적 행운을 가져다 줄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및 벨로루시대통령들과 합의한 "독립국가 공동체안"이
구소연방에 대신할 새정치체제로 확정됐다.
고르비-옐친간 합의에의해 내년1월1일자로 "독립국연방"이 공식
출범한다.
당초 고르비의 복안은 소련체제의 연장선위에서 개혁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옐친은 파산한 체제대신 독립국가 단위로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은 실패할 것이며 그 결과 모두가 우려하고 있는 위기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구소련체제의 기득권자들은 당연히 고르비를 지지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옐친의 생각에 동조한듯하다. 기득권층의 아성이었던 소련공산당이 붕괴된
이후 대세는 옐친쪽으로 기울어진것이다.
결국 구소연방의 영토위에는 우선 15개 독립국가가 세워지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러시아 연방공화국내 민족자치공화국들중 일부도 독립을 쟁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독립국가들은 "독립국가 공동체"내에서 대립과 공존을 계속하면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체제개혁을 계속할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 혁명은 계속되는
것이다. 그가 1989년에 이룩한 정치체제의 민주화개혁의 결과로 그 자신은
개혁추진의 주도권을 상실하였지만 바로 그 민주화 개혁의 열매중 하나인
옐친의 등장으로 개혁정책은 역사의 순리대로 계속될수 있게 되었다. 그의
보좌관인 샤흐나자로프의 말처럼 역사는 그의 업적을 호의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크게 보아 이러한 사태발전을 러시아제국사로의 회귀로 볼수는 없다.
오히려 역사적 부의 유산으로부터의 단절로 보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제국은 식민주의적 영토팽창정책을 추구하였던데 반하여 "독립국가
공동체"는 이들 피정복민족들을 위한 원상회복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다.
슬라브족 3개국가의 비중으로 보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할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유럽통합이후 통일독일이 차지할 비중이 막중하다고
하여 게르만민족사의 부활로 보는 관점이 부적절하듯이 러시아 우크
라이나및 벨로루시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한가지만 가지고 이전의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고 속단할수는 없다.
앞으로의 문제는 "공동체"내 독립국가들에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공존의 환경이 허용되는 것이다. 국익제일주의가 국가간 관계에서 불변의
외교정책인 이상 독립국가 상호간에 대결은 불가피할 것 같다. 한편
중기적 관점에서 판단하여 보면 독립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파산직전의
경제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공존의 필요성이 대결의 불가피성보다 우선시될
것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볼때 러시아군의 엘리트들은 직접 정권을 담당하려고 시도하기
보다 집권후보자중 한쪽을 지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권력브로커
였었다. 소비에트 시대에 흐루시초프의 집권을 도운 주코프원수나,브레즈
네프 시대에 군산복합체가 국가자원을 우선적으로 배정받는데 만족하여
왔던 사실은 이 전통이 계속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
사태에서도 소련의 군부 엘리트들은 집권을 획책하기 보다 기득권의
유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되리라고 판단된다.
군부엘리트를 비롯한 구 소련의 기득권층은 소련체제의 파산을 가져온
당사자들이다. 이들은 앞으로 전개될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체제개혁
과정에서 수반될 고통의 최우선적 분담자일수 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새로운 "공동체"의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민스크로 옮겨지면서 겪게될
이들 계층의 고통은 불가피할수 밖에 없다. 다른 누구보다도 소련국민들이
이것을 원하고 있다. 대중정치가인 옐친이 이러한 국민들의 욕구를
활용하여 크렘린 궁전으로부터 고르바초프를 밀어내는 수법은 가히
일품이라고 불러줄만 하다.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밀어 낸다고 하여 이 두사람의 지도자가
화해할수 없는 숙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들을 러시아 사상
유례가 드문 체제개혁 혁명의 동반자로 보고 있다.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위기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페레스트
로이카 혁명의 기치를 내세운이후 1991년8월 군사정변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는 개방화와 민주화를 통하여 구소련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옐친을 스베들로프스크의 당제1서기에서 일약 공산당
정치국후보위원으로 발탁하여 같이 손잡고 소련체제를 개혁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제 고르바초프가 추구하였던 구체제 연장선위에서의
개혁정책이 벽에 부딪친 시점에서 옐친이 개혁의 기치를 이어가는 것은
지도력의 계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지극히 다행스러운 사태의 발전이다.
똑같은 관점에서 옐친의 지도력이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그를 대신할
지도자가 등장할수 있다면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혁명은
궁극적 성공에 한걸음 더 접근할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제국의 권위주의 정치문화위에서 탄생한 구소련체제를 한사함의
지도자가 일시에 개혁할수 있다고 믿는것은 신화가 아닌 현실세계에서는
희망사항에 불과할 뿐이다. 구소련체제안에서 살아온 120여 제민족의
인민들에게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연속적 지도력은 사상 유례가 드문
행운이었다.
우리는 민주적 정치제도가 "공동체"의 인민들에게 옐친이후에도 이러한
연속적 행운을 가져다 줄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