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공업은 80년대 한국경제최고의 골칫덩어리였다. 발전설비를
생산하는 국가의 기간산업체였지만 경영상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정부가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으나 회사수지는 항상 적자의늪을 헤어나지
못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 식이었다. 정부는 이 골칫덩어리를
정상화하기 위해 수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민영화시키기로 방침을
정했으나 이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현대 삼성등 주요 대기업그룹들이
정부가 팔려는 가격으로는 인수할수 없다며 입찰에 등을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매력이 없는 기업이었다.
모두가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저었던 그 한국중공업이 지난해엔
흑자를 냈다. 그것도 5백억원이상에 달하는 대규모다.
공룡처럼 거대한 부실기업을 흑자로 돌려놓은 인물이 바로
안천학사장이다. 안사장은 취임직전 누적적자가 4천5백67억원에 이르러
완전자본잠식상태(당시 납입자본금 4천2백10억원)였던 이회사를 일으켜
"정상화의 귀재"라는 그의 명성을 다시한번 입증했다.
그가 한국중공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거의 상관없었다.
한중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던 청와대가 쌍용그룹에서 이름을 날리던
안사장의 얘기를 듣고 어느날 갑자기 그를 불러 이회사경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한것이다. 90년2월8일의 일이다. 당시 김석원쌍용그룹회장은
안사장이 그룹내에서도 할일이 많고 자신도 많이 투자한 사람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상당히 버티기도 했으나 청와대의 간청을 못이겨 결국 그를
내놓는데 동의했다고 한다.
"일찍출근해 공짜밥-
한중사장으로 부임한 그가 가장먼저 한일은 회사내에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우선 관심을 둔것은 서울출신으로 창원에서
객지생활을 하는 직원들이었다. 당시 서울출신 직원들은 5백여명이었는데
이들은 아침밥을 사먹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안사장은 이들에게 아침밥을
사먹을 바에야 한시간 일찍 출근해 회사에서 공짜밥을 먹으라고 설득했다.
자신은 더일찍 출근했고 아침식사를 이들과 같이 했다. 식사시간에
사장얼굴을 자주보게되니 일찍출근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부장이
나오자 과장도 나오고 과장이 나오니 반장 조장도 나오게 되더라는 것이다.
간부들에게는 따로 회사가 어려우므로 솔선해 일해달라고 누누이
당부했다. 간부들사이엔 아침일찍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풍토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하루12시간근무도 예사였다. 간부들이 일을
많이하자 노사문제가 적어지는 부수효과도 생겼다. 노조가 간부들을
동정하고 이해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와함께 그가 전개한 일은
"하루2만원더벌기운동"이다. 종업원 7천명이 하루1만원씩 쓰면
7천만원,2만원 쓰면 1억4천만원의 손실이 생기지만 안쓰고벌면
2억8천만원의 수입이 생기는 셈이라고 강조했다.
일거리는 사장인 자신이 책임지고 갖다주겠다고 공언했다. 국내외를
가리지않고 일을 찾아 돌아다녔다. 위에서는 일감을 만들고 밑에서는
열심히 일했다. 자연히 흑자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흑자기조구축에는 그가 공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종업원들과 친숙한
분위기를 만들어놓은 점도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거의매일 공장의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면서 직원들의 이름을 불러
업무에 관한 것을 물어보곤 한다. 수시로 현장에 전화를 걸어
업무진행과정이나 궁금한 사항을 묻기도 한다. 사장이 직접 지적하며
질문을하니 일을 보다 상세히 파악하지않을수 없었다.
한중의 흑자전환은 발전설비 일원화에도 적지않은 원인이 있지만 그의
경영능력이 더큰 힘이 됐음은 틀림없다. 그의 경영능력은 앞서 몸담았던
쌍용그룹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는 이그룹에서 쌍용제지와 쌍용중공업의
사장직을 거쳤다. 이두회사는 부임당시 모두 적자상태였으나 안사장의
치유를 받고부터는 흑자로 전환됐다.
쌍용제지사장직에 오른 것은 이그룹에 몸담은지 13년만인 82년의 일이다.
이회사는 산업용지와 소모성종이를 만드는 업체였으나 품질에 대한 평판이
좋지않아 고전을 면치못했다. 심지어는 직원들도 자기회사물건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우선 직원들에게 자사제품을 쓰도록 요구했다. 자신도 쓰지않는
사람이 남에게 권유할리 만무하다는 생각에서다. 심지어는 여직원의
핸드백을 열어 자사제품을 쓰는지 확인한 경우도 있었다.
자신도 직접 발로뛰었다. 판매를 독려하기위해 길거리에 나가 화장지를
팔았다. 부인까지 동원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백화점앞에서
제품선전.판매에 열을 올렸다. 사장이 호객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는
백화점사장도 놀랐다고한다.
판매최일선역할을 하는 리어카장수들을 불러모아 직접 얘기를
나누기도했다. 사장과 함께 회의를 한후 리어카장수들도 자부심을 갖고
신나서 물건을 팔더라는 것이다. 술집에 가더라도 여종업원들에게
자기회사생리대를 쓰도록 권유하는 일을 잊지않았다. 쌍용제지는 안사장
부임1년만에 곧바로 흑자로 전환됐다. 제지가 정상화되자마자 그는 다시
쌍용중공업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김석원회장은 엔진이 기계공업의
중추라는 면에서 이회사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나 만성적인 적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안사장이 1년만에 제지를 정상화시킨것을 본
김회장은 그에게 중공업정상화의 특명을 내렸다. 김회장으로는
마지막선택이었던 셈이다.
당시 중공업은 정말 한심했다. 수요처에선 아예 제품을 쓸생각을 않았고
직원들도 자신을 갖지 못했다. 은행에선 부장 과장들도 만나줄 생각을
안했다.
중공업시절 그는 거의 현장에만 있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직원들과 더불어 살았다. 업무상 애로점에서부터 직원들의 가족문제까지도
얘기를 나누면서 일체감을 갖도록 애썼다. 현장작업을 독려하면서
일감이나 자금을 구하는 일에는 자신이 직접 뛰었다. 일감을 구해주는것은
경영자의 몫이라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노사일체감등 강조
그는 결국 우리나라기업들이 쌍용엔진을 쓰게하고 해외시장에
수출하는데도 성공했다. 엔진수출은 86년부터로 일본에 매년 40 50대씩을
실어냈다. 당시기술수준을 고려하면 엔진수출은 대단한일이다.
그는 엔진수출을 위해 일본조선소에 직접 뛰어들어갔다. 반응이 좋을리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통하지 않자 안사장은 제품을 건네주면서
가격란을 백지상태로 넘겨줬다. 써보고 괜찮으면 값어치만큼의 돈만
달라고했다. 나중에 정상가격으로 계산된 대금이 송금돼왔다. 이렇게
개척한 일본시장은 연1천5백만달러가량의 수요처가 됐다. 쌍용중공업은
부임3년만에 흑자기업이 됐다. 그가 이회사를 떠나올때는 미운정 고운정이
듬뿍 밴 1천6백여직원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서로 가슴이 미어져
이별사와 답사도 제대로 읽지못했다. 공장정문까지 전직원들이 양편으로
도열해 감사와 석별의 박수를 보냈다. 그가 최고경영자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입신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안사장은 벽촌마을의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엔
학교다니기가 어려워 친구들의 집에서 일을 도와주면서 얹혀 살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을때는 자취생활을 했다. 친구와 친구어머니들의 적지않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이분들의 은혜를 가슴깊이 간직해 매년
명절때면 꼭 선물을 챙겨보내고 있다. 한친구의 어머니회갑때는 자신이
잔치를 주재하면서 어머니를 업고 한바퀴 돌기도했다. 사회생활도
잡역부로 시작했다. 첫입사한 삼척동양시멘트에서 시멘트제조에 필요한
석고를 푸는일부터 시작해 수입유연탄도 나르고 고철도 정리했다.
잡역부생활은 1년간 계속됐고 다음3년간은 창고정리업무를 맡았다.
4년만에 업무계장으로 승진됐다. 계장업무는 시멘트수송 지방판매
지방구매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4개월만에 계장을 면해달라고 간청해 사원으로 자진강등했다.
계장을 맡기엔 힘이 벅차더라는것이다. 그러나 다시 2년만에 계장을 거쳐
과장까지 승진했고 이후 동해전력으로 직장을 옮겼다. 시멘트보다는
발전소건설이 앞선분야로 생각되더라는 것이다. 동해전력에도 경험이 없어
사원으로 입사원서를 냈다. 그러나 과장까지 지낸사람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겠다는 것을 회사에서 이상히여겨 받아주질않았다. 한달간
애걸복걸해 겨우 촉탁사원으로 입사했다. 3개월동안 일해보고 괜찮으면
받아준다는 조건이었다.
동해전력에의 입사는 그의 인생행로에 큰 분기점을 이루게 된다. 그는
이회사에서 당시 사장이던 신현확전총리를 만났다. 그가 말단사원으로
입사한 이회사는 전체직원이라야 17명에 불과했으나 66만 급의
발전소건설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신사장은 다소 버거워보이는 이일을
완성키위해 아침마다 전직원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업무를 배정하는등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신사장의 모습에서 "사장이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하고 받은 깊은 감명은 그의 향후 경영스타일에도 큰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가 쌍용과 인연을 맺은것도 신현확씨 때문이었다. 신사장은
쌍용그룹으로 자리를 옮길때 성실하면서도 적극적인 그를 함께 데려갔고
국회로 진출할때까지 5년이상 그를 이끌었다. 그의 근무자세는
김석원회장의 눈에도 띄어 고속승진가도를 달리면서 입사7년만인 76년
이사로 승진했다. 시멘트와 기자재수출을 크게 늘려 쌍용을 종합상사로
만드는데 기여한 그는 이공로로 경영진에 발탁되는 기회를 잡았다.
김회장은 그의 저돌적스타일을 높이 사 82년 상무이던 그를 곧바로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모험적인사를 했다.
그의 경영스타일과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76년 시멘트수출을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중동을 드나들던 시절이다. 수출상담차 카타르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당시 카타르에서는 OPEC(석유수출국기구)회의가 열려
안전문제등으로 외국인은 입국이 불가능했다. 사우디비행장에서
사정사정했으나 도저히 표를 구할수가 없었다. 골몰하던 그는 고무신과
모시바지저고리를 입고 다시 공항을찾아가 카타르왕앞에서 태권도시범을
보여야하므로 비행기를 태워달라고해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입국한
그는 카타르상공장관을 만나 2천만달러규모의 시멘트수출을 성사시켰다.
안사장은 따지고보면 새마을운동도 자신이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70년대초 우리나라에는 시멘트가 남아돌았다. 쌓이는
재고로 고민하던 그는 농촌주택을 개량하면 시멘트가 대량으로 팔릴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추운겨울을 택해 우선 고향인 경북
봉화군에 이듬해 가을에 갚으라는 조건으로 4만7천부대의 시멘트를
외상으로 줬다. 다음해엔 이웃 영주군,강원도 명주군등으로 같은 방법을
확산시켰다. 이들군에서의 농촌주택개량사업의 평판이 좋아 전국적
새마을운동전개의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좌절감을 맛본적도 적지않았다. 대표적인 것은 이란의
팔레비정권이 붕괴되면서 수출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을 때다. 천신만고끝에
20만t규모의 시멘트수출을 성사시켰으나 온갖 고생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역시 이란에 수출했던 시멘트가 품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클레임을
받았던 76년의 일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보통 오전7시에 출근하는 그의 하루일과는 공장얘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에 있든 창원에 있든 본부장등 간부들을 모아놓고 전날의
공장일과 당일 계획을 듣고 토론한다. 오전중 2시간정도를 할애해 서류를
결재하고 오후엔 다시 공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등을 통해
현장진행상황을 확인한다.
밑바닥 인생도 경험
그의 이런 현장위주스타일은 잡역부에서부터 출발한 그의 인생행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밑바닥인생을 사는동안 현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피부로 느끼는 현장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대졸신입사원이라
하더라도 처음에는 공장에서 고철을 정리하는 업무를 맡기고 있다.
신입사원환영식 직원조례등에서도 "현장을 모르면 안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안사장은 다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이는 그의 스타일이 보여주듯
판매 수주등 영업측면에서 탁월한 재능을 갖고있다.
그가 상대적으로 다소 약한 부분은 재무관리및 회계분야. 지금까지
영업부문에만 집중됐기때문에 접할 기회가 적었던 탓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부문의 보고를 받을때는 보다 상세히 설명토록 하고 그내용을
관심깊게 듣는다.
안사장은 가끔 너무 독주한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공장을 돌아다니며
직접 업무를 점검하는가 하면 공장순시때 받은 인상을 인사때 반영하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는 연공서열에 의한 승진질서를 깨뜨렸다. 내부에서
불평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능력위주의 인사가 더 중요한 것으로 믿고있다.
"나이만 많다고 무조건 대통령을 시킬수는 없지않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경영인으로서 그가 갖고있는 소망은 자신의 구상아래 공장을 짓고 안정된
기반위에서 경영을 해보는 것이다. 한중에 가스터빈사업을 도입한 것도
이런 생각의 하나다. 그는 이같은 소망을 갖게된데 대해 "척박한 기업에
들어가 정상화하는데만 일생을 바쳤기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웃는다.
<이봉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