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 열리고 있는 ESCAP총회에 참석중인 이상옥외무장관과
전기침외교부장의 회담이 있은 다음부터 한중 양국의 수교문제가 또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고있다. 그러나 국내신문들의 떠들썩한 보도와는 달리
이장관과 전부장의 회담에서는 "수교"와 같은 무거운 문제는 거론되지도
않았고,"정상회담"같은 화제를 거론할 수 있는 분위기는 더욱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장관을 접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이례적으로 극진하였다. 현지
신문들은 전대회 의장에 대한 당연한 "예우"라고 보도하고
있으나,중국사람들이 늘 손님을 모시는 형식과 대화속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속마음을 드러내 왔다는 점에서 이장관의 북경방문을 통해서 중국은 두가지
점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는것 같다.
하나는 밀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해오던 대화통로를 외무장관 레벨의
공개적인 회담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양국간의 수교협상을
정식으로 추진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중국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오는데는 나름대로 이유가있다. 지금까지
중국은 한중수교의 전제조건으로서 세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 문제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그것은 남북간에 긴장완화가 이루어지고 협력관계가
어느정도 정착돼야 한다는것,미.북한간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져야 하며
일.북한관계에서도 일정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점,그리고 그 속도에
맞추어 한.중관계도 조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금이 수교협상을 시작할수있는 조건이 어느정도 충족된 상황으로
보고있다. 남북한간에는 6차평양회담(1992년2월19일)에서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효시켜 놓고 있다. 핵개발문제와 같은 미국의 요구를
북한이 적극 수용할 태세이기 때문에 미.북한관계도 급진전될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있다. 중국이 배후에서 김정일시대의 후견인역할을
착실히하고 있고,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어느때보다도 확고하기 때문에
한중수교문제를 거론할수 있는 충분조건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시각과는 달리 미.북한관계가 신속하게 개선될
가능성은 높지않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사찰 수용이외에도
테러포기,미군유해 송환,인권문제를 제기해 놓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또다른 카드를 사용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 필요성이
그만큼 크지 않고,또 서두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정반대다. 북한이 대미관계개선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대미관계에 진전이 있어야 실제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는
대일수교협상을 추진할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러한 북한의 속셈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중국이
이상옥장관을 마음놓고 환영할수 있은것도 사실은 북한에 대해 "너희들이
미국을 불러들이기 위해 꼬리를 흔드는 것이나,우리가 남조선 손님을
환대하는 것이나 매일반 아니냐"고 드러내 놓고 내댈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때 중국의 입장은 어느때보다도 호전되고 있다.
북한이 대미협상을 서두를수록,그만큼 중국의 한중관계도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쪽의 상황은 한결 어둡다. 왜 그럴까. 어떤
사람들은 한중수교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대만문제"를 꼽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1970년대 미.중관계 정상화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중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측면에서나,혹은 대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서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대만과의 단절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낡은
필름을 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는 중국도 "대만문제"를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중국정부가 대만과 함께 GATT(관세무역일반협정)에 동시가입하기로한
결정(1991년11월)이나,많은 국제조직속에 대만의 재가입을 인정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문제"는 협상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오히려 우리측에 있다. 한중수교는 미.일의 대북한
"교차승인의 고리를 푸는 계기"가 되고 있다. 미.일.중의 교차승인이
있고나면 한국이 북한에 대해 상대적으로 누려온 정통성의 지위도
사라지게될 것이다. 그렇게되면 미.일은 "두개의 한국정책"을 공개적으로
추진하게 될 것이며,이 정책은 결국 남북한에 대해 양면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남쪽에 유리한 것은 북쪽에 불리하고,북쪽에 웃는 일이 생기면
남쪽에서 우는 일이 생기게 되어있다.
교차승인의 고리를 푼다는 것이 이런 것이고,중국이 서울과 평양에
대사관을 갖게되면 이보다 더한 일이 얼마든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예고해 주는 것이다.
한국사람치고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과의 관계는 개선되어야하며,그것은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한중수교도 순리에 따라야한다. 남북관계에서 협력의 기반이 더
확고히 다져지고,가능한한 한.미.일 삼각관계가 정치 군사적으로 유기적인
협력을 추진해 나갈수 있을만큼 호전된 다음에 추진해야 하며,또 그렇게
될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좋은 숙제거리를 차세대에 남기겠다는 식의
인내심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남북간의 기반조성과 미.일과의 관계강화를
서둘러 나가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한건"하는
식으로 한중수교를 강행해 나간다면 결국 "게도 구럭도 잃는 결과가
될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