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 소녀의 꿈"은 그의 어떤 시보다 유명하다.
나어린 열일곱 소녀의 가슴위를 마구 짓밟은 소련탱트의 캐터필러는 바로
공산만행을 체험한 우리들 자신의 체험과 똑같은 아픔을 선사한 것이었다.
중고교 교과서마다 들어있기에 아마 모르는 젊은이가 없다. "장미의
시간에서 독사의 시간으로/ 웃음짓는 시간에서 증오의 시간으로/ 희망의
시간에서 절망의 시간으로/그리고 그 절망의 시간에서 피가 멎는 죽음의
시간까지는/단 한발작 밖에 되지 않는다/." 84년 체코 노벨상수상 시인
세미페르트의 장시 "페스트기념비"의 한 구절도 거의 똑같은 무게의 아픔을
안겨준다. 당시의 체코는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이때 일어난 것이
자유화바람,그 기수는 알렉산드르 두브체크 체코공산당 제1서기였다. 그의
출현은 경이적이었다.

그의 주장은 자유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접목시킨 "제3의 방법"으로
사회개혁을 하자는 것이었다. 67년 집권시에 그가 눈물을 흘린 사실은
유명하다. 맨먼저 그는 비밀경찰을 없애고 당의 민주화를 단행했으며
국민의 언로를 텄다. 당시의 에피소드 한토막을 소개하면,브레즈네프에게
해군성을 만들테니 경제원조를 하라고 했는데,브레즈네프는 노기를 띠며
"바다도 없고 배도 없는데 무슨놈의 해군성이냐"고 거절했다. 그러자
두브체크는 "그렇다면 소련엔 문화가 있어서 문화성을 만들었느냐"고
대들어 상대의 코를 납작하게 했다. 그만한 배짱인 그도 68년 8월의
소련침공이래 오지인 브라티스라바의 산림간수나 도형수로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프라하의 봄은 다시 깊은 얼음속에 묻힌채 한 시대의
영웅을 사장시켰다. 권력은 마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같은 것이었을까.

비록 500일의 단명에 그쳤던 "프라하의 봄"이긴 했지만 세계 지식인의
가슴속에는 영원한 감동으로 살아 남았다. 평소 그가 주장하는 인간의
얼굴을한 사회주의는,어쩌면 오늘의 소련몰락을 예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89년 바츨라프 하벨의 "벨뱃혁명"에 참여하여 화려한 정치재기를
했는가했더니 연방의회 의장에 머물렀다. 그가 엊그제 70세를 일기로
병원서 서거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