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설날은 아무래도 음력정월 초하룻날이라야 제격이다. 일
제가 조선을 찬탈한 이후 반세기 이상을 "양력설"이 강요되어 왔으나 양
력설은 끝내 고유명절로 민초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채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몇 주장이 갈려 있긴하나 대체로 몸을 "사
리는 날"이라는 설로 기울어지고 있다. 난세를 살아온 민중들이 첫해를
여는 이날 만이라도 몸을 "사려" 탈없는 첫날을 맞이하려는 기원이 담겨
있다. 근신(근신) 금기(금기)의 날로 한해의 설계를 다짐하는 날이 바
로 설날이었다. 그래서 설날을 한문으로 신일(신일)이라고 오랜 옛날부
터 표기해 왔다.

오늘은 섣달그믐.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이며 신일을
맞기위한 날이기도하다. 그래서 서양의 정초가 폭죽속에서 맞아지는데
반해 우리의 설날은 조용하게 찾아온다.

새해를 준비하고 설계해야한다는 점에서 설렘이 앞선다. 특히 새해에
는 새정부를 맞기 때문에 새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더욱 두드러지는
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직후 유럽지역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장
군이 비행기 편으로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비행기에 여러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낙하산 부대의 공정대원들도 뒷자리를 차지하고 있었
다.

낙하산부대원들은 전장에서 겪어온 아슬아슬한 모험담을 털어놓으면서
스스로의 전과를 자랑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착륙할
지점에 접근하자 이때까지 떠들썩하던 낙하산 부대원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불안해 했다. 장군이 "왜 조용해졌느냐"고
묻자 한 사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비행기의 좌석에 앉은채 이렇게 착륙
하기는 처음입니다. 저의 부대원은 하늘높이 나는 비행기에서만 뛰어내
려 왔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이 에피소드는 아이젠하워장군이 뒷날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후 그
자신에 의해 소개되었다. 이 일화는 아무리 용맹을 떨친 전사들이라도
경험하지 않은 세계에 부딪치면 겁을 먹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일깨워준
다.

신일을 맞는 우리의 심정이 착륙지점에 이른 낙하산부대의 용맹스런
부대원들의 심정과 흡사하다. 새정부에 대한 부푼기대와 함께 다가올
경제난기류에 대한 불안이 같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