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처럼 노래를 즐겨 부르는 국민은 없지 않을까 싶다. 일본에
가보면 유명한 성악가는 모두 교포출신이라는 얘기도 있다. 노랫가락부터
시작해서 소위 유행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집단으로 모였다 하면 합창이나
독창을 하게 마련이다.

심지어 관광 도중인데도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창밖을 스쳐지나는
시골풍경들을 즐기기는 커녕 그런데는 관심도 없이 노래부르기 장기대회를
벌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관광지까지 가는 경로가 산자수명하니 그 코스를
택하자는것 같은 일들은 아예 논의가 되지 않고 한시간이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좋아한다.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따지는
우리들의 취약점을 보는 것같아 민망하기까지하다.

예전에는 술이 한잔 들어가야 흥이 나고 흥이 나야 노래가 시작되는
법인데 요즘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노래방이 대유행이고 여기서는
술을 못마시게 한다니 노래를 부르면 흥이 저절로 나고 그 흥에 맞추어서
노래를 하는 논리다.

카메라 제조업자가 사진촬영과정에서 한 과정을 빼도 멋이 있는 사진을
촬영할수 있는 기법을 개발했다고 해서 카메라가 잘 팔려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것을 프로세스카트라고 한다. 우리나라 애창가들도 술을
마시는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수 있다면 그것은
원가를 절감하는 좋은 효과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유행가의 습득방법은 그 노래에 공감하고 우선 가사를
익히는 일이다. 그다음에는 레코드를 틀어놓거나(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혹은 그 곡을 잘 아는 친구에게서 노래의 곡조를 직접 배우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직접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기 때문에 그렇게 익힌 노래는 나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
언제 어디에서 불러도 그 노래를 배우던 과정,그 노래에 얽혀 있는
사연들이 연상되게 마련인데 반복해 들으며 익힌 노래에서 그러한 감회를
찾아낼수 있을까 의문이다. 노래에는 사람의 정서를 풍요하게 해주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 노래와함께 연상되는 정상이 있어야한다.

나는 예부터 노래를 못부르기로 이름이 나있다. 내 노래는 고저도
맞지않고 장단도 맞지 않아 친구들중에는 나를 음치로 취급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국민하교 2학년때의 일이다. 그날 오후에 담임선생님이 일이 있어서
우리는 자유롭게 놀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니 생각하고 들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선생님이 한분 들어오셔서 "내가 창가를 가르쳐줄테니
모두 다 잘 배워라"하시는 것이었다.

그선생님은 나의 선고였다. 엄격하기가 한이 없으셔서 나는 커오는
동안에 선고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은 한번도 없었다. 어린 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노래를 가르쳐 달래서 가르치다가 벼락이 떨어진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집안에서 노랫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러시던 선고께서 창가를 가르쳐 주시겠다니 선후가 맞지 않아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씩 둘씩 나가서 오르간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노래를 못하게 하셨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하지않으면 안되게된 내가 정신없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남게
앉지마라"까지 불렀을때 "그 놈 잘한다"는 평이 나왔다. 나는 그 다음을
부를 엄두도 못내고 넋잃은 사람처럼 서있다가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나는 창가를 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었을때는 일본제국주의의
군가가 판치고 우리말로된 유행가가 지금처럼 홍수를 이루지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겨우겨우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익혀서 나의
18번으로 등록했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생겼다.

친구중에 가장 친한 친구(정원훈군.전외환은행전무)가 어느 모임에서
이노래를 불렀는데 나보다 훨씬 잘 불렀다고 해서 그이후로는 정원훈의
몫으로 그노래를 꼽게 되어버렸다. 그 사람은 평북출신이라 두만강에 대한
감성이 더 풍부했을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나를 타일렀다.

나의 노래부르기에 대한 노력은 그후에도 계속되어 왔지만 간헐적인
노력으로 성과를 거둘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내가 잘알고 있다.
노력은 목표 달성성될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여기에도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노래활동"의 종지부를 찍게한 사람이 있다.
민자당후원회와 민자당당직자들의 1991년 연말회식때의 일이다. 나는
여러곳에 얘기를 해서 노래에서는 나를 빼달라고 했는데도 사회를 맡은
유명한 MC선생은 짓궂게 고집을 세워 부득기 마이크를 잡고 "황성옛터에
밤이 오니"를 내 전력을 기울여 열창한 일이 있다.

그런데 사회자의 코멘트는 "노래를 부르는지 시를 읊는지 알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노래인생은 과분한 칭찬으로 쇼크를 먹고 무자비한
혹평으로 다시한번 쇼크를 먹고는 맥이 끊어진 취약한 것이었으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된다. 더이상 미련을 갖지못하게한 그 사회자에게
2,3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