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봄방학을 이용해서 무전여행을 하기로 계획하고 한반의 친구
세명이 충청남도 일주여행에 나섰다.

사전에 반친구들에게도 알려두었던 계획이라 여러 친구들이 역에까지 나와
소위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담배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담배 열갑을
가져다 준 친구도 있었다. 무전여행을 한답시고 숙식을 구걸해야 할
주제에 돈을 내고 담배를 사 피워야 할 내처지를 생각해 준 그 친구의 착한
마음씨가 고마웠다.

완행열차로 조치원까지 내려가서 연기 공주 부여 강경 계룡산 유성에서
각각 1박하는 6박7일의 도보여행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사람을 보면 혹시 나를 해롭게 할 사람이나 아닐까 혹시 나를 괴롭힐
사람이나 아닐까 생각하는 요즘의 각박한 세상,심지어 낯이 익지 않은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간첩일 가능성이 있다고 신고를 해야 하는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었던 그러한 계획이었다.

무전여행을 한다는 그자체가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그런 고생을 통해서
세상인심을 알고 체험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고생을 하면서
세상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그렇게 진 신세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따뜻한 정이 오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희망하였던 것이다.

숙식을 구걸한다는 것은 다른사람에게 신세지는 것을 자청하는 것으로
6박7일동안 10여명에게 신세를 졌고 그 사람들 모두에게 한결같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터이지만 여기서는 그중 한가지만 적어 보기로 하겠다.

제4일째인 부여와 강경 사이에서 겪었던 일은 항상 파노라마와 같이 나의
뇌리에 떠오를 정도로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정오가 지나고
시장기는 도는데 가도가도 마을 하나 보이지 않는다. 시장기는 점점
더해가고 오후 3시가 되었을무렵 멀리 7,8호되는 농가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기와집도 하나 보였다. 우리는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기뻐하면서 단숨에 그곳에 다다랐다.

가장 부잣집 같아 보이는 그 기와집을 찾아가니 나오신 분은 60세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였다. 사연을 얘기하고 점심한끼를 간곡히
부탁드렸다. 할머니는 대단히 딱하다는듯 한숨을 쉬시며 "우리도 전에는
과객도 모실 줄 알고 범절도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되고 보니 그럴
여유가 없어졌다"고 도리어 우리에게 미안해 하셨다.

우리는 배가 고픈 것도 잊어버린채 감사하다는 인사말씀을 공손히 드리고
실망에찬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이삼백 나 갔을까,그 할머니께서 쫓아
오시면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학생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무리 험한 것을 대접해도 흉을
보지는 않을것 같아서 돌아오게 했다. 집에 있는 것이란 이것뿐이니
요기를 하고 가라"면서 큰바가지에 보리밥과 된장 한사발을 갖다 주셨다.
그렇게 맛있게 점심을 먹은 것은 생전 처음인것 같았다. 우리는 냉수
한사발씩을 얻어 마시고 천사같은 그 할머니와 작별을 했다.

그후 그 할머니댁을 찾으려고 여러번 시도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그자리에서 당장 그 은혜를 어떻게든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의리가 없는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됐던 것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 은혜를 갚지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직접 그
할머니에게 갚을 길이 없다면 다른 누구에게라도 갚아야 한다. 세상만사가
사람과 시간과 공간이 다 맞아 떨어지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체념하고
간접적으로 당사자 아닌 제3자에게라도 갚아야한다.

우리는 다 제각기 알고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헤아릴수 없는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란 은혜를 베풀어 주신분에게 직접 보답하는것이 가장 좋고
손쉬운 길이지만 때로는 베풀어 주신분의 신분이 너무 높다든지해서 보답을
하는 길을 찾을수 없을 수도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베푼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는,불특정의 얼굴없는 제3의 매체를 통하는 수밖에
없다.

옛 말에 "일일일선"이란 말이있다. 매일 착한 일을 한가지씩은 하라는
말이다. 내가 하는 한가지 착한일은 나의 마음을 윤택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훗날 다른 이가 나를 위해 착한일을 해주게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이
불교의 윤회사상이다. 꼭 보답을 위해 착한일을 하는것이 아니고 내가
이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것을 갚아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정신적인 것이든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그것을 받는 사람보다 항상 더 기분이 좋은 법이다. 최소한 내가 받은
은혜만큼은 사회에 되돌려 갚음으로써 적자인생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세상을 더욱 따뜻하게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