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12월6일 독일 뮌헨에 있는 유럽특허청 항소심공판정. 한국의
노교수가 세계적기업인 미듀폰사와 네덜란드 악소사의 쟁쟁한 연구원들과
외로운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7시간의 열띤 논쟁끝에 유럽특허청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윤한식박사의 "아라미드펄프"에 대한
물질특허권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기술이 세계적인 기술로
공인받는 순간이었다.

듀폰사와 악소사는 아라미드펄프의 특허권이 유럽에서 인정되는 것을
막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다. 아라미드펄프의 생산으로 자기들이
독점하다시피해온 석면대체재시장이 큰타격을 받을것이라는 우려에서 나온
공동전선이었다. 이에따라 유럽에서의 특허권은 예상된 86년보다
5년뒤에야 딸수있게 되었던것이다.

이같이 선진기업에 위협의 대상이 돼온 아라미드펄프가 지금은 무용지물로
전락할 위기에 몰려있다. 개발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상용화가
이뤄지지않고 있는 것이다. 유럽특허청에서의 승리가 한순간의 영광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진셈이다.

아라미드펄프는 윤박사가 지난 82년에 코오롱과 공동으로 개발한
아라미드류의 고강도섬유로 섭씨 3백~4백도의 고온에 견디고 내마모성이
뛰어나다. 전기 기계등 광범위한 산업분야에 쓰이면서도 발암물질을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진 석면을 대체할 획기적인 신소재로 평가되고 있다.

윤박사는 듀폰사와 악소사가 각각 자사제품인 케블라와 HM-50을 갈아서
만든 석면 대체재보다 아라미드펄프가 3배정도 더 가늘고 균일성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양산만 되면 시장석권은 문제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같은 기술이 아직도 실험실주위를 맴돌고 있다. 현재 구미에
있는 코오롱기술연구소(소장 이승조)의 파일럿플랜트(시험공장)에서
공정개발이 이뤄지고 있으나 아직도 양산체제를 갖추기에는 전체기술수준이
부족한 형편이다. 그이유는 국내화학산업의 실상을 보여준다.

코오롱기술연구소는 85년 아라미드펄프의 국내및 미국특허획득을 시작으로
KIST공정연구실과 함께 본격적인 양산공정기술개발에 들어갔다.

"아라미드펄프의 핵심원료인 바라페니린디아민을 구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구입가격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죠"
이승조소장은 아라미드펄프를 양산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을 핵심원료인
바라페니린디아민의 구입난으로 꼽는다. 이원료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제조,판매하는 듀폰사와 악소사는 정상적인 원료가격의 5배를 요구하고
있다. 아라미드펄프 완제품과 맞먹는 가격으로 공급하겠다는 의도이다.
이원료를 생산할수 있는 다른업체가 있긴하지만 소량생산에 그치고 있으며
가격이 고가여서 채산성이 맞지않는다는게 이소장의 설명이다.

윤박사는 국내에 바라페니린디아민을 양산,제조하는 기술이 없는것은
국내화학산업이 대부분 외국기술에 의존해온데따른 것이라고 풀이한다.
국내의 일부업체도 이원료를 만들수 있으나 이원료의 원료 또 그원료를
모두 제조할수 없어 결국 선진국으로부터 구입해야만 한다. 기초원료부터
자체제조 생산해낼수 있는 선진국과 기본적으로 경쟁이 안된다는 얘기이다.

아라미드펄프제조기술이 개발됐으나 주변기술인 화학원료제조기술이 이를
따라가주지못한 셈이다. 한분야만의 기술력이 높다고 모든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수있다.

이소장은 국내화학공정기술의 낙후도 아라미드펄프 사업화의 발목을 잡는
또다른 주요인이라고 말한다.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물을 상용화
할수있게하는 생산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아라미드펄프생산은 기존의
섬유제조공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방사공정이 생략되는 대신 거의 모든
공정설비를 새롭게 설계해야하는등 후속 기술개발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계등 관련분야 기술수준이 이를 따라가주지못한다는게 이소장의
설명이다.

코오롱은 현재 국내 일부업체와 일본 유럽 중국등지에 있는 화학업체중
바라페니린디아민의 양산제조공정기술을 함께 개발할 파트너를 찾고있다.
그러나 외국기업의 견제,기술력부족등으로 여의치않은 상황이다.

국내 노벨상 1호를 받을것으로까지 평가되던 세계적기술인
아라미드펄프,듀폰사등의 선진기업에 두려움을 안겨주던 이신소재가
실험실에서 잠자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과학기술계의 한계라고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기초과학과 산업기술을 접목할수있는 탄력성있는 기술축적이
이뤄지지않는한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겉돌수밖에 없다는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오광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