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해본 사람은 몰라. 장관자리가 얼마나 좋은건지"지난해
김기춘전법무부장관이 했던 말이다. "그렇게좋은"자리는 비단 장관만이
아니다. 돈줄을 움켜쥐고있는 은행장자리 또한 장관자리에 비견될만큼
막강하다. 사흘만이라도 좋으니 은행장을 한번 해보고
싶어."(일본기업소설 "은행장실"중에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은행장자리는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적어도 달포전부터는 이말이 맞지않다. 오히려 "가시방석"
"파리목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은행장의 위세는 땅에 떨어져있다. 한달
남짓사이에 김준협서울신탁은행장 이병선보람은행장 박기진제일은행장이
차례로 물러났고 급기야는 안영모동화은행장이 구속문턱에까지 다다랐다.

주식회사이긴 하나 재무부산하단체(시중은행)의 장인 은행장이 감히
장관자리와 비교될수있는 것은 "한기관의 장"이상의 의미를 갖고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돈"이다.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이
누구이든간에,그리고 은행의 주인이 어떻든 간에 돈을 나눠주는 최고
결정권자가 은행장이다.

순간의 결정으로 쓰러져가는 기업을 살릴수도있고 잘나가는 기업의 목을
옭죌수도있다.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가진사람"이라고 불리는것이 더
어울릴는지도 모른다.

지난85년2월14일 제일은행등 4개은행의 자금및 자산실사단이 국제그룹에
들이닥쳤다. 이로부터 꼭 8일후인 22일에 국내재벌랭킹6위였던 국제그룹은
"파산선고"를 받았다. 비록 자금상태가 엉망이고 비능률경영이란 고질적인
문제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4만여명의 근로자를 먹여살리는 대기업의
공중분해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최고권력자에게 밉보였던것이 재벌그룹해체의 한 원인이라는 소문이
더 그럴듯하지만 국제해체의 형식상 최종결정권자는 다름아닌 이필선당시
제일은행장이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국제의 해체정리는 경제원리에 따른 것이고 주동자는
바로 나다"(88년4월 이필선제일은행장)
이전행장의 말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일수는 없다고 해도 은행장의 결정이
국제그룹을 공중분해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대그룹도 쓰러뜨릴 힘을 가진
은행장들이다보니 한푼의 돈이라도 얻어써야할 기업들은 쩔쩔맬수밖에
없다. 은행장의 각종 비리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특정기업에
대출해주면서 커미션을 챙기는 것은 다반사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래왔다. 지난해까지만해도 자금만 제때에 공급해주면 돈을 얼마든지
주겠다는 기업들이 은행장실앞에 줄을 설 정도였다. 지난14일 물러난
박기진제일은행장은 동생회사에 4백억원이상을 긴급대형식으로 지원했다.
비록 규정에 어긋나지않는 대출이었지만 다른 은행들이 대출을 거부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좋지않은 회사에 자금지원을 해줄수 있었던것은
은행장이 가지는 "힘"에 의해서 였다.

한 은행의 대출잔액은 대형은행의 경우 11조 안팎에 달한다. 이중 3분1인
3조~4조원정도가 1년동안 신규승인된다. 하루에 1백억원꼴이다. 은행장이
결재해야 대출이되는 돈이 60%이상이나 된다. 또 은행관행상 1억원이 넘는
대출은 은행장에게 보고를 해야한다. 은행장의 권한이 어디까지인지를
쉽게 짐작할수 있다.

은행장들의 한달봉급은 평균2백만원정도(주주총회결정사항).
공식판공비는 5백여만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은행장들이 한달에 쓰는
돈은 공식경비의 서너배에서 최고 10배까지 된다. "은행장 한번하면 3대가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축재도 상당하다.

지난 90년 5.8대책후 물러난 이병선 당시 한일은행장의
"비공식적"퇴진이유는 부동산과다보유였다. 그는 91년 보람은행장으로
복귀했으나 2년이 못돼 같은 이유로 물러난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막강한 은행장도 굽실거려야할 사람이 없는건 아니다. 손쉽게
뭉칫돈을 만들수있는 자리인만큼 권력자들이 내버려 둘리 만무하다.
6공1기만해도 L의원 K의원 P의원 K씨등을 등에 업지않고서는 은행장자리에
오른다는것은 꿈도 꿀수 없었다.

그러나 은행장을 천년만년 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울신탁은행의
경우 윤호병초대행장부터 김준협16대행장까지 평균재임기간은 2년1개월밖에
안된다. 돈을 만지는 자리인만큼 말썽도 많은 탓이다. 율산사건(79년)
장영자사건(82년)명성사건(83년)등이 터질때마다 은행장들이 구속되거나
옷을 벗었다. 사회기강 확립차원에서 필요할때마다 제1의 사정대상이
된것도 은행장이다.

그렇지만 지난해 여름부터 6명의 은행장이 잇따라 그만둔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은행장의 대학살"이란 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릴만도 하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사람은 없다지만 사정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은행장 자신들이다.

<하영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