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7) 커미션은 관행..70년대초부터 대출금 3%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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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조그만 봉제공장을 운영하는 허모씨(41)는 지난해여름
부도위기에 몰렸었다. 허씨는 거래하는 은행으로부터 30평 남짓한 집을
담보로 급히 5천만원을 빌려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이때 허씨는
대부주임에게 수고비조로 2백만원을 건넸다. 평소엔 1백만원이면 됐으나
사정이 급한 만큼 수고비도 배로 뛰었다. 허씨는 이돈을 굳이
"수고비"라고 우겼다.
허씨가 건넨돈이 수고비든 사례비든 커미션은 커미션이다. 대출에 따르는
비용(신용조사 담보설정 이자등)이 아닌 이상 "웃돈"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대출에 이같은 커미션이 따른다는 것은 대출을 받아본 사람이면
다아는 사실이다.
"3%는 주셔야지요"한 국책은행의 이모대리(35)는 지점대부주임시절 이말을
못해 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엔 대출받은 고객이 간혹 주는
사례비만을 상사에게 전달했었다. 그러나 "대출금의 3%에서 모자라는
만큼은 네가 챙겼구나"라는 윗사람들의 사시를 견딜수 없었다고 한다.
은행들의 커미션수수방법은 은행별로 약간 다르다. 예금유치등에 필요한
비용만을 가까운 거래처에 "정중히"부탁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예 일률적(대출금의 3%안팎)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커미션의 역사는 경제개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자금은 한정돼 있는
반면 돈이 필요한 기업은 많았다. "투자는 곧 이익"이었던 시절에 "대출은
곧 시혜"였다. 은행들이 요구하지않아도 기업들은 웃돈을 싸들고 줄을
섰다. 금리가 낮은 정책자금은 정도가 더욱 심했다. 커미션을 주어도
일반자금보다 비용이 훨씬 적어서이다. 그래서 요즘도 모국책은행의
커미션수수가 가장 많다고 한다.
주로 비조직적으로 이뤄지던 커미션수수는 70년대초반부터 관행으로
정착됐다. 자유당시절의 "저축추진비"가 3공화국들어 없어졌지만
60년대까지는 그래도 지점경비는 풍족한 편이었다고한다.
은행원들의 봉급이 다른 샐러리맨수준에 맞춰지면서 지점의
"업무추진비"도 줄어들었다. 반면 수신경쟁의 격화로 지점의 씀씀이는
늘어났다.
요즘 지점에 내려오는 업무추진비는 월평균 2백여만원에 불과하다.
이돈으로 고객을 접대하고 직원단합도 꾀해야한다. 또 제2금융권과
맞서기위한 "예금사오기"의 경비도 이돈에서 나간다.
한 시중은행의 대부과장인 김모씨(38)는 하루에도 몇번씩 지점장을
만난다. 단지 "대부"라는 업무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관리하는 이른바
"비노트"의 구두결제를 받기 위해서다. 비노트란 커미션등으로 만든
비공식적 지점경비를 관리하는 장부이다. 김과장은 매달 일정액을 만들어
은행살림을 꾸려간다. 지난70년대후반 모시중은행 본점영업부에서
김과장같은 사람이 만들었던 비노트자금은 매달 2천만원(당시 대졸행원
초임 15만원)에 달한것으로 알려져있다.
K은행 L지점장(51)은 "세달에 한번씩 업무추진비로 6백만원을 받고있지만
한달이면 바닥이 나고만다. 나머지 두달은 고객들로부터 사례비조로 받은
돈으로 지점살림을 꾸릴수밖에 없다"고 털어놓는다.
커미션의 역사가 길고 용도도 분명한 이상 하루아침에 뿌리뽑기는 어려운
일이다. 관계자들은 업무추진비를 올려주고 제1,2금융권간의 금리격차를
해소시키는등 구조적 문제해결이 선행돼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은행원들의 사고라는 지적들이 많다.
커미션의 상당부분은 개인의 축재로 쓰여졌음도 부인할수 없다. 대출이
시혜로 여결질수밖에없고 은행원들의 사고도 그렇게 돼 있는한 말많은
커미션이 없어질리는 만무하다.
<하영춘기자> <이 시리즈는 매주화요일에 실립니다>
부도위기에 몰렸었다. 허씨는 거래하는 은행으로부터 30평 남짓한 집을
담보로 급히 5천만원을 빌려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이때 허씨는
대부주임에게 수고비조로 2백만원을 건넸다. 평소엔 1백만원이면 됐으나
사정이 급한 만큼 수고비도 배로 뛰었다. 허씨는 이돈을 굳이
"수고비"라고 우겼다.
허씨가 건넨돈이 수고비든 사례비든 커미션은 커미션이다. 대출에 따르는
비용(신용조사 담보설정 이자등)이 아닌 이상 "웃돈"이라고 할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대출에 이같은 커미션이 따른다는 것은 대출을 받아본 사람이면
다아는 사실이다.
"3%는 주셔야지요"한 국책은행의 이모대리(35)는 지점대부주임시절 이말을
못해 애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처음엔 대출받은 고객이 간혹 주는
사례비만을 상사에게 전달했었다. 그러나 "대출금의 3%에서 모자라는
만큼은 네가 챙겼구나"라는 윗사람들의 사시를 견딜수 없었다고 한다.
은행들의 커미션수수방법은 은행별로 약간 다르다. 예금유치등에 필요한
비용만을 가까운 거래처에 "정중히"부탁하는 경우도 있고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예 일률적(대출금의 3%안팎)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커미션의 역사는 경제개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자금은 한정돼 있는
반면 돈이 필요한 기업은 많았다. "투자는 곧 이익"이었던 시절에 "대출은
곧 시혜"였다. 은행들이 요구하지않아도 기업들은 웃돈을 싸들고 줄을
섰다. 금리가 낮은 정책자금은 정도가 더욱 심했다. 커미션을 주어도
일반자금보다 비용이 훨씬 적어서이다. 그래서 요즘도 모국책은행의
커미션수수가 가장 많다고 한다.
주로 비조직적으로 이뤄지던 커미션수수는 70년대초반부터 관행으로
정착됐다. 자유당시절의 "저축추진비"가 3공화국들어 없어졌지만
60년대까지는 그래도 지점경비는 풍족한 편이었다고한다.
은행원들의 봉급이 다른 샐러리맨수준에 맞춰지면서 지점의
"업무추진비"도 줄어들었다. 반면 수신경쟁의 격화로 지점의 씀씀이는
늘어났다.
요즘 지점에 내려오는 업무추진비는 월평균 2백여만원에 불과하다.
이돈으로 고객을 접대하고 직원단합도 꾀해야한다. 또 제2금융권과
맞서기위한 "예금사오기"의 경비도 이돈에서 나간다.
한 시중은행의 대부과장인 김모씨(38)는 하루에도 몇번씩 지점장을
만난다. 단지 "대부"라는 업무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관리하는 이른바
"비노트"의 구두결제를 받기 위해서다. 비노트란 커미션등으로 만든
비공식적 지점경비를 관리하는 장부이다. 김과장은 매달 일정액을 만들어
은행살림을 꾸려간다. 지난70년대후반 모시중은행 본점영업부에서
김과장같은 사람이 만들었던 비노트자금은 매달 2천만원(당시 대졸행원
초임 15만원)에 달한것으로 알려져있다.
K은행 L지점장(51)은 "세달에 한번씩 업무추진비로 6백만원을 받고있지만
한달이면 바닥이 나고만다. 나머지 두달은 고객들로부터 사례비조로 받은
돈으로 지점살림을 꾸릴수밖에 없다"고 털어놓는다.
커미션의 역사가 길고 용도도 분명한 이상 하루아침에 뿌리뽑기는 어려운
일이다. 관계자들은 업무추진비를 올려주고 제1,2금융권간의 금리격차를
해소시키는등 구조적 문제해결이 선행돼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은행원들의 사고라는 지적들이 많다.
커미션의 상당부분은 개인의 축재로 쓰여졌음도 부인할수 없다. 대출이
시혜로 여결질수밖에없고 은행원들의 사고도 그렇게 돼 있는한 말많은
커미션이 없어질리는 만무하다.
<하영춘기자> <이 시리즈는 매주화요일에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