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업분야에선 서울의 목촌약방(1879년9월개점)등 일반인을 상대로한
양약방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것으로
단순한 매약소형태였다.

그러다가 1897년 궁중에서 선전관(무관)으로 근무하던 민 호가
궁중비방약을 양약의 간편성에 접합시켜 소화제 활명수를 제조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국산 최초의 양약이었다.

기독교신자인 민 호는 처음에 자기가 만든 활명수를 옷소매에 넣고 다니며
교회의 신자나 아픈 사람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활명수의 간편성과 약효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차 널리 알려지자 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게됐고 급기야 민 호의 집으로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공급이 달리게된 그는 같은해 9월25일 한성부 서구 수렛골(차동)5번지
자택에 양산시설을 갖추고 동화약방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상호 동화는 주역과 시전에서,상표 "부채표"는 지죽상합생기청풍이란
말에서 유래한것으로 "합심하여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동단결하자"는 뜻이
담겨있다는것.

1909년 그의 장남 민 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경영체제를 구축했고
1931년에는 법인등기를 마치고 초대사장에 취임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시정"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대박람회(공진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동화약방은 대도약의 발판을
구축했다. 한편 이를 전후해 조고약의 제조원
천일약방(1912년)제생당약방(1909년)조선매약(1913년)등이 제약기업의 틀을
잡아나갔다.

그런데 민 은 약업자라기보다 독립운동가로서 더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김가진을 총재로 한 대동단을 조직했으며 기미독립운동때 최남선
함태영등과 독립선언문을 기초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독립운동과 관련,동화약방의 제품이 멀리 북간도 하와이
일본등지로까지 수출됐으나 그 대금은 대부분 독립운동기금으로 사용됐다.

이로인해 일경의 탄압이 심해져 제품허가도 86종에서 26종으로 제한됐다.

상해망명중 일경에 체포.압송된 그는 48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고만다(정부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국민훈장을 추서했다).

민 의 요절로 그의 아들(민인복)과 부인(이효진)이 동화약방의 경영권을
이어받았지만 곧 경영부실로 도산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하는수없이 민인복은 당시 경제계에서 덕망과 인품을 갖춘 보당
윤창식에게 동화의 인수를 제의했다.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민 과 알고지내던 보당은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에 봉사한다"는 동화의 창업정신과 민 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이를 수락하고 1937년 2월 제5대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를 계기로 동화는
현대적 기업으로 발전하는 제2의 창업기를 맞게 됐다.

연간 30만병이던 생산능력을 인수3년후인 1940년에는 2백만병수준으로
늘려 약7배의 성장을 이룩했다.

1942년에는 안동에 분공장을 설립,중국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1945년 조국이 광복을 맞으면서 동화는 오히려 북방시장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거기에다 미군의 무료의약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자 국내 판매마저
신통치않아 국내최초의 제약기업이었던 동화는 1945년 9월 스스로 문을
닫고말았다. 가까스로 1948년에 약품생산을 재개했지만 동화는
6.25전란으로 또 다시 허탈감을 맛보게 됐다.

더구나 대부분의 기업은 6.25후 외국차관으로 생산시설의 복구를
서둘렀으나 민족자본에 의한 자력갱생을 고집하던 동화는 62년에
동화약품으로 상호를 바꾸어 뒤늦게 66년에야 본격적인 재건작업에
착수,서울 중구 순화동5번지로 동명이 바뀐 같은 장소에서 본사및 공장을
신축,재출범했다. 이후 동화는 까스활명수 알파활명수등 액제위장약의
계열화를 구축하며 제품다양화를 추진했다.

72년에는 위장운동촉진제 메트로클로프라미드를 자체기술로 합성하는데
성공하는 것을 비롯 75년엔 국내 최초로 뇌기능촉진제 "하이덜진",77년에는
불임증 치료제 "팔로델"등의 획기적인 치료제를 생산해내면서 초기의
창업정신을 구현하고있다.

동화약품은 현재 전문경영체제를 갖춰 이우용씨가 사장직을 맡고있으며
지난해 1천6백15억원어치를 생산,국내 제약업계 2위를 달리고 있다.

<김대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