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계좌를 개설할때 종종 일어난다.
예금하러 가서 한국처럼 예금주대접을 기대했다가는 대접은 커녕 은행원과
언쟁만 하고 돌아오기 일쑤다. 기자가 2년전 워싱턴에 왔을때의 경험담
한토막.
당시 기자는 사무소설치비용,자동차구입비,주택임대비,기타 비용등으로
3만달러의 여행자수표를 국내은행에서 환전,미국에 왔다. 수표를 그냥
갖고있기가 불안해 우선 은행을 찾아갔다. 3만달러라는 거금을 들고
은행에 들어설때는 지점장이 뛰어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한국식 사고방식에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은행원과 마주 앉아 예금계좌를 개설하는데 은행원이 계좌를
개설해줄수 없다고 계속 버티는 것이었다. 기자의 신원확인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여권을 보여주고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사흘전에 워싱턴에
왔다는 설명을 해도 통하지 않았다. 돈을 갖고와서 사정을 하는데도
받아주지 않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속으로 미국은행들이 일본은행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바로
이같이 멍청한 은행원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그 다음날
주위에 사는 신원이 확실한 교포가 가서 신분을 보증해준 다음에야
예금계좌를 열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금융실명제인 것이다. 금융실명제라는
말자체는 없지만 은행에 계좌를 개설할때는 반드시 본인명의로 하고
그사람의 신원을 파악한 다음에야계좌를 개설해주고 있다. 가명이나
차명계좌는 있을수가 없다.
가명이나 차명계좌를 가지려면 은행원과 공동으로 모의를 해야하는데
이역시 나중에 은행이 국세청에 해당계좌의 이자소득등을 통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미국이 언제부터 이같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처음부터 은행마다 이처럼 실명을 원칙으로 계좌를
개설해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행으로 정착됐다는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여기에는 신용을 중시하는 사회풍토와 모든 계약시에는 계약당사자가 직접
서명하는 관행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또 한국과 달리 미국은 은행이 도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명으로
예금했다가는 나중에 은행이 도산할 경우 제대로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예금주 자신도 실명을 선호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관행으로 정착돼오던 미국의 금융실명제가 구체적인 법조문에 반영된 것은
지난 70년에 제정된 현금및 외환거래보고법(일명 은행비밀법.Bank Secrecy
Act)에서다.
이법은 원래 금융실명제를 목표로 했던것이 아니고 마약거래등에서
일어나는 자금세탁(Money Laundering)및 탈세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됐다.
그동안 금융기관이 자체적으로 실시하던 실명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은행이 미국세청에 보고해야하는 의무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법에 따르면 은행은 고객의 인적사항,즉 이름 주소
소셜시큐리티넘버(일종의 주민등록번호) 생년월일등을 반드시 확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미국시민권자인 경우 운전면허증 미국여권
시민권증서등으로 확인하고 미국시민권자가 아닌 경우에는 여권 영주권
운전면허증등으로 확인하도록 하고있다.
또 법인인 경우에는 회사의 정관과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한 등록증명서를
첨부하고 주주들의 개인별 신원확인을 거친다음에 계좌를 개설해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법보다는 각은행의 자체규정에 따라 신분을 확인하기 때문에
은행마다 차이가 있다. 기자가 당한 것처럼 보수적인 은행의 경우
신분확인절차가 더 까다롭다.
개설계좌의 사회보장번호가 실제번호와 다르거나 번호기입을 누락시켰을
경우 금융기관은 건당 50달러의 과태료를 물고 있다. 그러나 벌금이
경미한데서 엿볼수 있듯이 은행자체가 실명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행정상의 실수에 대한 벌칙에 지나지 않는다. 금융감독당국은 아예 은행이
가명계좌를 개설해줄수 있다는 가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금융기관에 대한 계좌개설이 이처럼 철저히 실명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금융거래 역시 실명으로 이뤄지고 있다.
은행에 예금을 하든 증권투자를하든 모든 금융거래가 자기의 개인계좌나
법인계좌를 통해 이뤄지고 있어 비실명거래는 있을수가 없다. 그런점에서
비실명금융자산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하다못해 돈을 송금하는 경우에도 그냥은 안되고 반드시 계좌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은행에 계좌를 갖고있지 못한 사람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보낼수도 없다.
또 우리나라처럼 자기앞수표가 이사람 저사람 손으로 마구 돌아다닐수도
없다. 비실명 금융거래의 대표격인 자기앞수표라는 제도가 없는데다
개인수표는 반드시 지급인으로 명시된 사람의 계좌에서만 입금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에서의 비실명거래는 금융권 밖에서 일어나는 현금거래가
유일하다고 볼수있다.
<워싱턴=최완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