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들이 수세기 걸려 해낸 일을 한 세대에 해내는
과정에서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다보니 서둘러 대충대충하며
거칠어짐이 버릇처럼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물론 이런 방식이 한때는
한국적 효율(Korean efficiency)로 통했던 때도 있었다.

초기 중동진출과정이 공기단축작전으로 건설효율을 크게 높인 점이나
산업의 구조가 중화학을 표방해오는 사이 중후장대화.대량생산화되었다는
점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한때 독일기술자가 한국의 지하철공사 현장을 둘러 보고 무릎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안전시설을 이중삼중으로 하는 그들의 방식보다는 간단한
방법으로 빠른 회전을 하면 효율이 높아진다는 경제원리에 맞게 맡겨진
상황을 부러워하면서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무렵 무악재로 가는 지하철
공사장의 낙반사고로 많은 인명을 잃었다.

생활정서 속에서도 대충대충문화는 위아래가 없었다. 한때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또는 "봐줄 수 있을 때 봐주어라"는 제법 대범하고 의기있는
듯한 말이 변져있었다. 공익이나 공권력의 사적 이용까지도 덕으로
착각했던 문화정서의 암울했던 기간의 소산이었다.

그동안 소외되던 다중들은 민주화과정을 거치면서 3D기피현상에 젖어들고
노사협의 과정에서 지켜져야 하는 기강이 깨지면서 적당주의가 팽배해
왔다. 거칠어진 마무리가 제품의 반송률을 높여 경쟁력을
떨어뜨리더니,행주대교.상가아파트 붕괴,급기야는 구포열차사고로
이어지는 대형재해의 연속을 초래했다. 이는 분명 막을 수
있었고,또한 있어서도 안될 인재로 밖에 볼수가 없다.

이제 우리는 다원화된 정보화사회를 맞아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이 변혁의 시대에 맞게 적당주의를 철저히 배제하고 거친 마음과 손길을
좀더 촘촘하고 섬세하게 돌려놓을 수는 없을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성을 얹어놓아야 하고 인명을 중시하며 사익과
패거리심리를 뿌리뽑아 공사의 분별력을 기르는 길을 터득해야 한다.

어려운 선택이고 왜소해 보이는 길이지만 이것이 우리 모두가 바로 사는
대도일 것이다. 이는 개개인이 해야 할 일이지만 사회가 집단으로
시스템화하는 방안이 모두가 공감하는 방식으로 이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