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동락] 이영재 조사개발원 대표 .. 일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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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신문방송학과 1회 입학동기들이 대학2학년때 "일목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매달 첫째 목요일에 만나 시사토론과 훈훈한 정을 나누고있다.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것은 28년동안(66년3월부터 93년5월까지
3백27개월)단 한달도 거르지않고 모임을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71년도에는 회원들이 군복무를 집중적으로 한탓에 모두 모이기는
어려웠지만 2명만이 참석해도 모임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일목회"가 결성된것은 66년2월8일 안명수군이 필자에게 보낸 한장의
엽서가 발단이 되었다. "보람있는 방학생활을 보내고 있겠지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우리학과 명칭이 홍보학과에서 신문방송학과로 개칭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1학년이 흘러가 버리고 새학년이 되지 않았습니까.
2학년을 맞이하여 신문방송학과에 서클을 하나만들어 볼 생각은 없는지요.
발기 첫모임은 개학직후에 갖고 모든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곧 회답 부탁드립니다"이제안대로 66년3월 개학이 되자마자
뜻이 맞는 12명이 "신방토론회"라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일목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목은 첫째 목요일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그루 나무의 곧음의 푸르름을 더 강조하고 있다.
대학 재학중에는 신문방송학과 관련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외부강사도 초빙하여 특강을 듣곤 하였으나 졸업후에는 시사토론과 화목의
대화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어두웠던 군사 독재시절에는 문을걸어
잠그고 기탄없이 정권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은 개혁과
비리가 주로 도마위에 오른다. 모임장소는 개인사업을 하는 필자
광화문사무실에서 시작하여 근처 음식점으로 이어진다.
회원은 처음 12명이었으나 한명(심재인.LSA CMS 프로덕션대표)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명예회원이 되었고 또 한명(최중근.다성기획대표)은 9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의 비통함을 어찌 다 표현할수 있으랴. 현재 10명의 회원은
강봉식(한일개발 홍보실)고수웅(KBS보도국 과학부부장)김수영(제일화재
감사실)김헌배(중앙공사 부사장)안명수(약국신문
주간)이래성(선연이사)임종대(사업)차효식(제일화제
영업소)최규섭(금강기획 국장),그리고 필자이다. 회원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신입회원은 전원일치의 입회동의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는 회비가 없었으나 졸업후 75년까지는 월5천원,그후 지금까지
1만원씩을 갹출하여 저녁식사도하고 경조사에 부조도하고 92년에는
후배들을 위하여 장학금도 희사하였다. 앞으로도 현재와 같이 회비를
아끼며 뜻있게 사용하겠지만 30주년이 되면 모든회원이 부부동반하여
백두산을 등반하고자 한다. 우리들은 건강한 몸으로 백두산에 올라 통일을
기원할 것이다
만들어 매달 첫째 목요일에 만나 시사토론과 훈훈한 정을 나누고있다.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것은 28년동안(66년3월부터 93년5월까지
3백27개월)단 한달도 거르지않고 모임을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71년도에는 회원들이 군복무를 집중적으로 한탓에 모두 모이기는
어려웠지만 2명만이 참석해도 모임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일목회"가 결성된것은 66년2월8일 안명수군이 필자에게 보낸 한장의
엽서가 발단이 되었다. "보람있는 방학생활을 보내고 있겠지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 우리학과 명칭이 홍보학과에서 신문방송학과로 개칭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1학년이 흘러가 버리고 새학년이 되지 않았습니까.
2학년을 맞이하여 신문방송학과에 서클을 하나만들어 볼 생각은 없는지요.
발기 첫모임은 개학직후에 갖고 모든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곧 회답 부탁드립니다"이제안대로 66년3월 개학이 되자마자
뜻이 맞는 12명이 "신방토론회"라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일목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목은 첫째 목요일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그루 나무의 곧음의 푸르름을 더 강조하고 있다.
대학 재학중에는 신문방송학과 관련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외부강사도 초빙하여 특강을 듣곤 하였으나 졸업후에는 시사토론과 화목의
대화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어두웠던 군사 독재시절에는 문을걸어
잠그고 기탄없이 정권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으나 요즈음은 개혁과
비리가 주로 도마위에 오른다. 모임장소는 개인사업을 하는 필자
광화문사무실에서 시작하여 근처 음식점으로 이어진다.
회원은 처음 12명이었으나 한명(심재인.LSA CMS 프로덕션대표)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명예회원이 되었고 또 한명(최중근.다성기획대표)은 9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의 비통함을 어찌 다 표현할수 있으랴. 현재 10명의 회원은
강봉식(한일개발 홍보실)고수웅(KBS보도국 과학부부장)김수영(제일화재
감사실)김헌배(중앙공사 부사장)안명수(약국신문
주간)이래성(선연이사)임종대(사업)차효식(제일화제
영업소)최규섭(금강기획 국장),그리고 필자이다. 회원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신입회원은 전원일치의 입회동의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는 회비가 없었으나 졸업후 75년까지는 월5천원,그후 지금까지
1만원씩을 갹출하여 저녁식사도하고 경조사에 부조도하고 92년에는
후배들을 위하여 장학금도 희사하였다. 앞으로도 현재와 같이 회비를
아끼며 뜻있게 사용하겠지만 30주년이 되면 모든회원이 부부동반하여
백두산을 등반하고자 한다. 우리들은 건강한 몸으로 백두산에 올라 통일을
기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