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만록] <고광식의 역사산책> 어찌 차마 할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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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22년(1440년)5월13일 서대문밖 홍제원 길섶 웅덩이에서 젊은
여인하나가 시체로 발견됐다.
의금부에서는 곧 나졸들을 풀어 수사를 벌였다. 불량배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문초했지만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의금부 형조 한성부가 한달가까이 합동수사를 펴는 소동끝에 범인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범인은 의정부의 종1품직 대신인 좌찬성 이맹균의
처였다.
"여러날을 두고 추핵하는 바람에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수두룩하고
혹은 편달을 가하여 성안 사람이 모두 그 해독을 입었는데 이맹균의 처
이씨가 집의 계집종을 질투한 끝에 죽인뒤 내다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남녀가 그집 문앞에 모여들어 극언으로 마구 욕하고 꾸짖으니 잠깐동안에
골목을 가득 메웠다"
"세종실록"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당시의 정황을 어느정도 짐작할수 있다.
다 늙어 70이 가까웠는데도 여전히 시새움이 심하고 사나운 처때문에 온갖
참을수 없는 수모를 겪은 이맹균은 노구를 이끌고 뒤늦게 임금앞에 나아가
자초지종을 고할수 밖에 없었다.
"신이 놀라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아룁니다. 집의 계집종이
죄가 있으므로 신의 처가 종을 시켜 때리고 그 머리털을 잘랐는데
5월13일에 이르러 죽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시켜 묻어주도록 했는데 뒤에 알아보니 홍제원 길가에
내다버렸다는 사연이었다.
묘당대신의 체면에 차마 자신이 가까이 하던 계집종을 아내 이씨가
시기해서 흠씬 두들겨패게 한뒤 움속에 처넣고 굶겨죽였다는것까지
고백할수는 없었다.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에서 이맹균부처를 엄벌해야한다는 논핵이 잇달았다.
두사람을 처벌한뒤 이혼시켜야 한다는 강경론이 단연 우세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와 숙의를 거듭한 끝에 이맹균을 파직시키고 정경부인
이씨의 작첩을 거두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했다.
조정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죄는 중한데 벌은 너무 가볍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남편은 남편노릇을 못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을 못했으니 강상이 땅을
쓸었습니다. 또 대신으로서 즉시 자수하지 않고 아내의 악한짓을
덮어주려한 것은 천총을 기망한 것입니다"
"이맹균의 처 이씨는 나이가 거의 70이나 됐으면서도 질투하는 마음이
더욱 타올라 남편의 첩을 죽게 만들었으니 그 잔인하고 추악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어진 마음이 있는 자가 차마 할
일입니까"
연이어 올라오는 상소를 일일이 검토한 세종은 역시 성군다운 판결을
내렸다.
"서로 허물을 숨겨주는 것이 부부의 정리이니 그것은 임금을 속인 것으로
볼수없다. 선유도 "질추는 부인의 보통일"이라했다. 또 여자는 처음에
빈천했다가 뒤에 부귀해지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으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씨가 비록 질투하고 아들이 없다고는 하나 이 두가지
버리지 못하는 의가 있으니이혼시킬수는 없다. 작첩을 거둔 것으로
족하다. 남편이 되어서 가도를 바르게 세우지않아 아내를 제어하지
못했으니 맹균은 진실로 죄가 있다. 맹균을 황해도 우봉현으로
귀양보내도록 하라"
악처때문에 이맹균은 관직에서 파면돼 귀양살이를 하는 신세가 됐다.
그로부터 두어달 뒤인 8월,석방명령을 받아 귀양길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오던 그는 개성부에 이르러 객사하고 말았다.
여말 삼은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의 장손으로 일찍부터 가업을 이어 시문이
전아했던 이맹균은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세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성품은 온화하고 부드러웠고 성균관대사성 이조.병조판서
사헌부대사헌등 요직을 두루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오직
아내때문에 화려했던 가문의 명예와 일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가여운
지아비가 돼버렸다.
그가 죽자 사관은 그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당시 사람들이 부인에게 압제를 받은 맹균이 편하게 죽지도 못했음을
불쌍하게 여기다"
5백53년전 이맹균은 죽었지만 근래에 사정이 시작된이후 경우는
다르다해도 그와 비슷한 처지가된 전직 공직자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들이 이맹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내의 잘못을
두둔해주려들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뒤집어 씌우려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세종이 이들의 죄과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보나마나 극형인 "참대시"(추분이 되기를 기다려 목을 베는것을 이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
여인하나가 시체로 발견됐다.
의금부에서는 곧 나졸들을 풀어 수사를 벌였다. 불량배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문초했지만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의금부 형조 한성부가 한달가까이 합동수사를 펴는 소동끝에 범인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범인은 의정부의 종1품직 대신인 좌찬성 이맹균의
처였다.
"여러날을 두고 추핵하는 바람에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수두룩하고
혹은 편달을 가하여 성안 사람이 모두 그 해독을 입었는데 이맹균의 처
이씨가 집의 계집종을 질투한 끝에 죽인뒤 내다버렸다는 소문을 듣고
남녀가 그집 문앞에 모여들어 극언으로 마구 욕하고 꾸짖으니 잠깐동안에
골목을 가득 메웠다"
"세종실록"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당시의 정황을 어느정도 짐작할수 있다.
다 늙어 70이 가까웠는데도 여전히 시새움이 심하고 사나운 처때문에 온갖
참을수 없는 수모를 겪은 이맹균은 노구를 이끌고 뒤늦게 임금앞에 나아가
자초지종을 고할수 밖에 없었다.
"신이 놀라고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아룁니다. 집의 계집종이
죄가 있으므로 신의 처가 종을 시켜 때리고 그 머리털을 잘랐는데
5월13일에 이르러 죽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시켜 묻어주도록 했는데 뒤에 알아보니 홍제원 길가에
내다버렸다는 사연이었다.
묘당대신의 체면에 차마 자신이 가까이 하던 계집종을 아내 이씨가
시기해서 흠씬 두들겨패게 한뒤 움속에 처넣고 굶겨죽였다는것까지
고백할수는 없었다.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에서 이맹균부처를 엄벌해야한다는 논핵이 잇달았다.
두사람을 처벌한뒤 이혼시켜야 한다는 강경론이 단연 우세했다.
세종은 영의정 황희와 숙의를 거듭한 끝에 이맹균을 파직시키고 정경부인
이씨의 작첩을 거두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했다.
조정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죄는 중한데 벌은 너무 가볍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남편은 남편노릇을 못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을 못했으니 강상이 땅을
쓸었습니다. 또 대신으로서 즉시 자수하지 않고 아내의 악한짓을
덮어주려한 것은 천총을 기망한 것입니다"
"이맹균의 처 이씨는 나이가 거의 70이나 됐으면서도 질투하는 마음이
더욱 타올라 남편의 첩을 죽게 만들었으니 그 잔인하고 추악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어진 마음이 있는 자가 차마 할
일입니까"
연이어 올라오는 상소를 일일이 검토한 세종은 역시 성군다운 판결을
내렸다.
"서로 허물을 숨겨주는 것이 부부의 정리이니 그것은 임금을 속인 것으로
볼수없다. 선유도 "질추는 부인의 보통일"이라했다. 또 여자는 처음에
빈천했다가 뒤에 부귀해지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으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씨가 비록 질투하고 아들이 없다고는 하나 이 두가지
버리지 못하는 의가 있으니이혼시킬수는 없다. 작첩을 거둔 것으로
족하다. 남편이 되어서 가도를 바르게 세우지않아 아내를 제어하지
못했으니 맹균은 진실로 죄가 있다. 맹균을 황해도 우봉현으로
귀양보내도록 하라"
악처때문에 이맹균은 관직에서 파면돼 귀양살이를 하는 신세가 됐다.
그로부터 두어달 뒤인 8월,석방명령을 받아 귀양길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오던 그는 개성부에 이르러 객사하고 말았다.
여말 삼은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의 장손으로 일찍부터 가업을 이어 시문이
전아했던 이맹균은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세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성품은 온화하고 부드러웠고 성균관대사성 이조.병조판서
사헌부대사헌등 요직을 두루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오직
아내때문에 화려했던 가문의 명예와 일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가여운
지아비가 돼버렸다.
그가 죽자 사관은 그의 경력을 소개하면서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당시 사람들이 부인에게 압제를 받은 맹균이 편하게 죽지도 못했음을
불쌍하게 여기다"
5백53년전 이맹균은 죽었지만 근래에 사정이 시작된이후 경우는
다르다해도 그와 비슷한 처지가된 전직 공직자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들이 이맹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내의 잘못을
두둔해주려들기는 커녕 오히려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뒤집어 씌우려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세종이 이들의 죄과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보나마나 극형인 "참대시"(추분이 되기를 기다려 목을 베는것을 이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