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중반 삼화인쇄는 자동컬러 오프셋 인쇄로 그 성가가
높았다. 국내에서 2색 오프셋인쇄기가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던 67년에
서독제 자동 전자색분해기와 4색전지 오프셋인쇄기를 한국 최초로
도입하였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시설투자를 보고 한편에서는 돌았다고
비웃고 또 한편으로는 일거리도 많지 않은 국내시장을 휩쓸어가려 한다고
비난의 눈총을 던지기도 했다.

이러한 시설과 기술을 바탕으로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월간 "사상계"
"여원" 학원사의 "원색대백과사전"등을 인쇄하여 한국인쇄계의
금자탑이라는 평가도 들었다. 그러나 사업이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사상계사와 여원사의 경영악화로 인쇄.제본비등의 미수금이 약2억원에
이르렀다. 오늘날 대재벌로 성장한 D사가 당시5백백만원으로 창립한 것을
생각하면 2억원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여원사의 사장은 나에게 완전 백지 위임을 하면서 여원사판권과 개인
소유의 모든 부동산에 대한 권리를 양도하겠으니 부도만은 막아달라고
했다. 잡지를 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미수금을 모두 떼이는 것보다 그래도
잘하면 "여원"을 살릴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인수하기로 했다. 우리는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끝에 한달에 3백만원씩 적자를 보던 여원사를 1년후
50만원씩 흑자를 내는 잡지사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흑자가
나니까 여원사 사장은 잡지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지만 결국은 미수금의 일부를 받고 매달
얼마씩 갚아가겠다는 약속을 믿고 "여원"을 돌려주었다. 그후 여원사는
다시 실패하고 잡지는 폐간되고 말았다(현재의 "여원"과는 무관함).

어려운 일은 회사 내부에서나 일신상의 일에도 많았다. 하루는 국민학교
동창생이 찾아와서는 수표를 교환해달라고 부탁했다. 친분상 거절하기도
어렵고 또 많은 액수도 아니어서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신용을 잘 지키더니 나중에 가서는 점점 액수가 올라가 마침내 6백만원의
부도를 내고 달아나 버렸다. 꼼짝없이 내가 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돈을
받으러 온 사람이 "옛말에 빚보증을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말
못들으셨습니까"라고 하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동창생의 부탁으로 그의 처제를 경리부에 넣어주었는데
야금야금 경리부정을 저질러 나중에 알고 보니 강남에 커다란 집까지 지어
놓았다. 인생이 불쌍하여 고발은 하지않고 그집만 압류처분하고
퇴직시키는 선으로 그쳤지만 인사 관리의 어려움을 새삼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1962년에 삼화출판사를 설립했다. 보통학교 때부터 어린 새싹들을 위해
좋은 책을 많이 펴내는 출판사를 세우겠다고 다짐하였었다. 출판사의 첫
사업으로 작고한 아동문학가 이원수씨의 도움을 얻어 소년소녀
세계전기전집12권,세계동화전집15권,소년소녀 미담집3권을 펴냈다. 이
제작비가 당시 금액으로 약7천만원이나 소요되었다. 내가 출판사를
시작한다니까 "원효로에 좋은 땅(지금의 용산 전자단지)이 있는데 평당
5천원씩이니 이것을 사두면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주위에서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소년시절의 결심을
실행하겠다는 마음으로 출판사를 시작한 것이다.

70년 영등포구 양평동에 대지3천7백평 규모의 공장을 매입하고 삼화인쇄
오프셋인쇄와 제본 시설을 이곳으로 옮겼다. 71년에는 인쇄시설 확장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필름압출기와 플라스틱용기제조기를 설치했다. 85년에는
구로동에 대지 4천5백평을 매입,플라스틱부를 독립시켜
삼화플라콘주식회사를 별도로 설립했다.

70년대부터 생각지도 않았던 국회의원생활 10년,중소기협중앙회 회장직
8년을 마치고 86년에 본업으로 돌아왔다. 공직생활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간에 기업에만 전념했다면 70년대 이후
고도성장기에 다른 기업 못지않게 발전시킬수도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유회장,업종 선택을
잘못한것 같소. 당신이 다른 업종을 택했더라면 재벌이 되었을텐데"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에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세계 최초라는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2백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발명했으며 팔만대장경
같은 불후의 인쇄문화를 물려준 위대한 조상들의 얼을 이어받아 발전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올해 5월에 삼화인쇄는 창업 40주년을 맞아 구로동의
4천5백평 대지에 신사옥을 신축,최신 시설을 갖추어 제2의 창업을 다짐하고
2000년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쉬지않고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