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독서의 느낌이 다르게 마련이다.
윤동주의 "서시" 첫구절이 주는 강열한 느낌이 청소년기에는 뿌듯한
자신감이었다면 장년기 이후에는 부끄러움과 회한의 몸서림이다. 아마도
얼굴 두터운 위선자들을 예외로 다룬다면 부끄러운 일로 얼룩진 지난날의
기억때문에 번민하지않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아침마다 새로운 다짐과
기대로 시작하고서도 저녁이면 하루를 돌이키며 잠자리가 불편한것이 우리
대부분의 참 모습이다. 하물며 지난30여년의 군사정권시대를 돌이켜
보고서야.

우리 사회의 근대역사는 격동과 단절로 점철되었으니만치 그 와중에
살아온 사람들의 과거기록이 자랑스런 내용들만으로 구성되기 어렵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럽지 않을정도로 판단기준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본다면 일제시대 국내거주자들,"6. 25"때 비도강 잔류민들 그리고
지난30여년간 군사정권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거의 예외없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죄인들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그때마다 죽음을
택하였거나 사태이후 이들에게 단죄가 내려졌더라면 오늘의
한국사회발전수준은 과연 어떠할까!

이들이 그때마다의 고난을 체험하며 살아남아 왔다는 것,그리고
어두움속에서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지만 은근히 날이 밝기를
기다려왔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오늘날
문민정부의 탄생이 가능하게된 힘의 근원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중산층의
조용한 선택 덕분이었다. 그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을
비롯하여 적극행동파들의 공헌도 물론 컸지만 폭넓은 중산계층의지지가
없었더라면 문민정부의 현재 실세들은 아직도 재야에 묻혀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지난번 대선때 표의 향방이 말해준다.

지난 날의 정권들은 단순하게는 호소력있는 구호를 통해 진지하게는
치적의 사업평가를 통해서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노력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으나,이번의 문민정부는 애초부터 이러한 부담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민정부는 나름대로의 부담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듯 하다. 이는 바로 과거 정권들과의 차별화의식이다.

비록 호랑이굴을 거쳐 출범했지만 지난 6공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3공이래
군사정권들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것이 신정권 핵심부의 솔직한
심경일 것이다. 항상 신임 또는 전임의 비행을 들추어낼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위치한다. 바로 여기서 요즈음 신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다지는
여러갈래의 굵직굵직한 노다지들을 발견하고 있다.

이것이 신정권의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해주고 있는 사정작업의
진면목이다.

현재 국민의 높은 인기도 유지에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신정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몇가지 생각의 가닥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첫째로 폭넓게는 사회현상일반이 그러하지만 특히 경제현상의 흐름은
단절이나 갑작스런 방향회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정부 등장이후
6공시대와 다르게 경제흐름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둔하다. 재야시절
아무리 정치 민주화의 중요성이 압도적인 것으로 보였더라도,정치민주화가
곧 그대로 국민경제의 기본문제해결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냉철한
경제원리는 집권정부가 군사정권이든 문민정권이든 차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구미의 선진민주국가들도 경제문제로 골치 앓이하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둘째로 국민 경제흐름의 양과 질은 경제주체들의 이기심 발동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의 인식이 정치논리 또는 재야성향의 주장들에 밀려
퇴색되고 있는 느낌이다.
"고통분담"도 각계각층의 계몽된 이기심과 일치할 때만 효과를 거둘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이만한 수준의 경제생활을 누릴수 있게된 배경에는
모두가 제 능력껏 잘 살아 보겠다는 욕심 덕분이었다. 하늘에 한점
부끄럼없는 경제생활이란 있을수 없다. 법제도와 관행의 테두리 속에서
인정되는 경제활동의 자유는 폭넓게 뻗을수 있어야 하고 항상 경제주체들의
이기심은 그 테두리를 압박하며 그 신축성을 심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한다. 문민정부가 들어섰다고 경제주체들에게 이기심의 포기를
바란다면,꿀 모으기를 게을리한 벌통이 폐사하듯이 국민경제는 피폐해진다.

셋째로 경제주체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서 경제적 효율성의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물론 사람다운 삶을 위해 도덕적 기준도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경제문제에 관한한 솔직한 사실인식내지 고해성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최근 사정으로 밝혀진 엄청난 부정 비리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신이 지난날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작은 투기자였음을 지나쳐버리고
있다. 만약 정보와 능력이 있었더라면 큼직하게 부동산투기 한두 탕
안했을 사람이 드물것이다. 말하자면 4,000만 인구 전체가 미필적
투기꾼들이었고 지금도 잠재적으로 그러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국제경제 흐름과 단절해 존립할수 있는 섬나라가
아니다. 긴밀한 국제경제교류 속에서 생존번영의 터전을 넓혀가야 한다.
지난치게 제몫 챙기기,남 흠집내기 놀이에 취해있는 동안 우리 경쟁국들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신정부의 눈이 미래로,나라밖으로 향해주기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