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는 수산나와 두 장로의 얘기가 나온다.

수산나는 유태인 여호야김의 아내로서 아름답고 믿음이 깊은 부인이었다.
어느날 그녀가 집근처의 과수원을 거닐고 있을때 판사로 뽑힌 두 사람의
장로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나머지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가 증인이
되어 당신이 간음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공표하겠다"고 협박했다. 정숙한
그녀가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지르자 그 장로들도 맞고함을 치면서
사람들에게 거짓증언을 하여 재판대에 세웠다.

결국 사형이 확정된 그녀가 형장으로 끌려 가는것을 본 예언자 다니엘은
장로들이 거짓말을 했음을 알아차리고 재심을 요구했다. 다니엘은 두
장로를 따로 불러 "어떤 나무밑에서 간음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묻자 한
사람은 "유향나무 아래",또 한사람은 "나무밑"이라고 다른 대답을 했다.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것이 위증임을 알고 두 장로를 죽여버렸다.
다니엘이라는 현명한 재판관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수산나는 영락없이
처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재판관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법 조문에
의거하여 형을 재량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으나 위증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 수사당국이나 변호인등 피고인측의 반대 거증이 없는
한 그것을 간파해 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재판관이 역사가와 철학자와 예언자에게 요구되는 기능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바 있으나 설사 그러한 자질을 갖춘
재판관이 있다 하더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판결을 내릴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은 과욕이다. 재판관 역시 인간의 모든 약점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증인의 위증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허송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일생동안 전과자라는 누명의
굴레속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데에 있다.

막연한 추정과 증언에 의해 도둑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한
회사원이 며칠전 재판부의 진상규명으로 풀려난 사건은 이 순간에도 이와
유사한 인권유린 사례가 없지 않으리란 우려감을 낳는다. 편파적
졸속수사가 존재하는 한 기대할 곳은 재판관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