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자]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대통령은 자금 소요계획을 보더니 "부총리,낼수 있소"했다. 이 말은
박대통령은 이미 결심을 했으니 부총리보고 조치하라는 명령과 같았다.
김학렬부총리는 "네,상공부안대로 조치하겠습니다"하고 명쾌한 답을 했다.
박대통령은 "그럼 상공부안대로 추진하시오"하고 결정을 내렸다. 앞으로
8년간의 자금(목돈)이 마련된것이다.

그 해는 전자공업육성자금이란 항목조차 없어 기계공업육성자금의 일부를
사용하였는데 이 브리핑을 계기로 다음해부터 전자공업육성자금의 항목이
신설되고 풍부한 자금이 전자공업쪽에 흘러 들어가게됐다.

이때부터 전자공업은 비약적인 도약을 시작하게 된다. (주:브리핑은
2시간이나 소요됐다. 브리핑을 끝내고 박대통령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담배를 한대 피우며 배석한 장관들과 전자공업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통령은 내가 브리핑을 하면서 이해를 돕기위해 큰
베니어판에 붙여놓은 전자부품의 실물을 가리키면서 "전에(김학열부총리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일때)콘덴서가 무엇인지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더구만. 저기 베니어판에 축전기라고 써놓은 것이 바로 그
콘덴서야"하며 웃었다. 박대통령의 전자과학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깊다는것을 알고 모두 놀랐다. 대만의 전자공업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상공부로 돌아오니 김장관은 장관실로 모두 불렀다. 차관 차관보도
불렀다.
이철승차관이 "잘 되었습니까"하고 물었다. 김장관은 "홈런이야.
전자공업육성자금도 무수정통과야"하면서 커피를 시켰다. 그날따라
커피맛이 아주 좋았다.

이병철회장 새진로찾아
이후부터 박대통령은 전자공업육성문제에 대해 상공부안을 신뢰하고 적극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전자공업육성 8개년계획안은 69년6월19일에
대대적으로 발표됐고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주일후인 6월26일 삼성의
이병철회장은 중앙일보에다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이라는 글을 썼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부는 69년1월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공포하고 전자공업진흥
기본계획기간(69~76년)중 국산화를 촉진,전자기기 부품의 계열화와
양산화를 확대함으로써 수출을 증대시킬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전자공업은 그 영역과 기술혁신의 속도가 다른 분야에 비할 바 아니어서
부단한 국제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어려운 사업입니다. 무한한 세계시장을
갖고 있으며 투자액에 비해 수익률이 높아 우리의 자본 기술 경영등 온갖
역량을 모아 추진한다면 그 전도는 밝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기업간의 공존공영은 선진국에서는 상례화되어있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나라 전자공업이 육성되어야 한국경제의 질적 심화와 우회생산의
확대도 가져올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부는 전자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로 결정,삼성도 이에
참여코자 하는데 기업간의 공존공영,즉 기업간의 선의의 경쟁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일임에도 왜 반대하느냐하는 취지였다. 삼성은 69년3월
일본의 산요전기와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정부에 인가신청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국내 기존 전자업체들의 모임인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산하
59개업체는 6월26일 대정부 건의서를 통해 "삼성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전자공업의 합작투자 사업은 전자산업의 개발이 아니라 조립에 지나지
않으므로 합작투자가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반대하고 있었다. 속
내용은 국내시장은 내 놓을수 없다는 취지였다. 이병철회장의 글이 신문에
나오게된 동기이다.

삼성은 텔레비전수상기와 라디오 총생산량의 15%만 국내에 공급하고
나머지 85%는 수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으나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
산하 업체들은 삼성의 합작투자를 반대하는 진정내용을 7월1일 동아일보에
게재하는등 적극적인 저지활동을 벌였다. 삼성의 국내공급계획인
15%선마저도 기존기업들의 존속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정부가
전량수출이 아니고서는 허가할수 없다는 방침을 밝힘으로써 관련업계는
진정됐지만 삼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9월2일 전량수출을 조건으로 정부의
인가가 나와 12월4일 삼성산요전기 (77년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가
설립되었다.

합작투자 비율은 삼성전자공업이 50%,일본 산요전기가 40%,주우상사가
10%로서 70년까지 총5천만달러(1백50억원)를 투자키로 했다. 또한
특허권및 모든 기술자료의 제공,제조설비 원자재 기술정보 노하우에 관련된
필요한 기술공여 등의 계약이 체결되었으며 삼성산요전기는 삼성이외의
한국내 유사기업에 참여치 않는다는 사항을 약속했다.

또 전량수출조건으로 9월22일 정부에 제출한 NEC와의 합작투자신청도
별다른 반대없이 인가를 받아 70년1월20일 삼성NEC도 설립됐다.

삼성그룹은 지주회사인 삼성전자,그리고 합작회사인 삼성산요 삼성NEC의
3개 전자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후에 "전량수출 조건"문제는 앞으로
상공부를 중간에 놓고 삼성과 기존업자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일으키게
된다.

삼성그룹은 전자업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병철회장은
66년9월22일 한국비료를 헌납한후 삼성의 새로운 진로를 찾고 있다가
전자산업에 진출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비록 후발기업일지라도
세계굴지의 종합전자메이커로 육성하겠다는 방침아래 삼성전자는
<>전자단지의 대형화<>공정의 수직 계열화<>기술개발능력의 조속확보라는
3대 기본원칙을 세우고 공장부지를 물색하던 끝에 69년10월 경기도 수원시
근교의 매탄벌에 45만평,경남 울주군내 가천지역에 70만평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항간에서는 삼성이 부동산투기를 한다는 억측이 떠돌았다.
국내전자업계에서도 가장 크다는 공장규모가 수만평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이회장은 "전자는 어느정도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다. 그리고
기술의 메리트,규모의 메리트로 세계시장을 파고 들어야 성공한다. 지금은
이땅의 면적이 크게 보일지 모르지만 멀지않아 더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된다. 일본의 산요전기는 단지면적이 40만평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한평이라도 더 큰 단지를 지어야 하기때문에 단지규모는 45만평으로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까지 국내 가전시장은 금성사가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삼성전자와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것이다.

박대통령이 전자공업 육성에 대해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장면은 여러곳에
나타나는데 여기에도 한 대목이 나온다.

공업이란 기업가가 하는 것이고 기업가가 발벗고 나서야한다. 그런데
"전자공업"이란 당시 우리나라 경제계에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분야였다.
그러니 기업가들이 투자를 하려고 하지않았다. 이래서 박대통령은 몸소
투자유치에 나섰던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대한전자공학회가 공동으로 제1회 국제전자공업
세미나를 열었다. 68년 9월2일부터 7일까지 6일간에 걸쳐 각 연구소 대학
업체등 7개소를 순회하면서 개최되었다.

이 세미나에는 미국과 일본의 우수한 일선 학자와 연구원 13명을
초청하였다. 당시의 최신 전자공업 동향과 기술을 소개하는 목적과
우리나라의 현황을 비교 검토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때 참가한 학자들 중에서 그뒤 정부에서 전개한 해외 두뇌 유치계획에
의해 귀국한 사람이 많이 있다.

이들은 체재중 청와대를 예방하게 되었는데 박대통령은 국내 굴지의
재벌들을 찾아 전자공업을 권유토록 지시했다고 했다. 그래서 김완희박사
일행은 처음에 삼성그룹의 이병철회장을 만났다.

부인과 함께 장충동의 이회장 댁으로 저녁초대를 받은 김박사는
전자공업이야말로 개발도상국의 실업인들이 사운을 걸고 파고 들어가야할
분야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회장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김박사의
설득만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겠지만) 드디어 69년엔 삼성의 전자공업이
시작됐다고 김박사는 회고한다.

두번째로는 구인회럭키그룹회장을 찾았다. 구회장은 이미 58년에
금성사를 설립하여 그동안 라디오 TV 냉장고 등을 만들어 왔고 이같은
전자사업에 사운을 걸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었다. 다만
구회장은 앞으로도 전자공업을 주력사업으로 꾸준히 펴나가겠다고 했다.

그다음은 삼호재벌의 정재호씨,그리고 한진의 조중훈씨,대한전선의
설경동씨등 10여명의 재계인사도 만나서 투자를 권했다고 한다.

대한전선의 설사장은 이미 전선외에 전자사업을 시작하고 이어
통신공업(전화교환기)참여를 벼르다 번번이 실패하던 때였는데 김박사를
만나자 "한국에선 이제 크로스바 교환기를 채택해야 할 때인데도 일부
관리들이 눈이 멀어서 이를 외면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며 교환기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금성사와 대한전선은 전선공장 건설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했다. 그후도 기회 있을때마다 서로 양보할 줄 몰랐다.
금성사는 체신부에 교환기를 독점하다시피 공급했다. 큰 이권이었다.
대한전선도 납품하기를 원했는데 금성사는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서로
국회의원을 동원했다. 그래서 매년 국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으나 항시 금성사가 승자가 되었다. 이 문제가 해결나게 되는 때는
전자식 교환기가 생산되고 난 후였다)
그 중에서는 전자공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뛰어든 예도 생기게 됐다.

박대통령은 김박사에게 서정귀씨도 만났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박사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 이튿날 국제호텔 커피숍에서 서씨를 만났다.
알고보니 그는 박대통령의 대구사범 동창으로 성격이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김박사는 회고한다. 서씨는 몇가지 설명을 듣더니 "그것 한번 해봅시다.
다만 나는 백지상태이니 김박사가 품목을 선정해주시오"라며 선뜻 나섰다고
한다.

가동하자마자 브레이크
그런데 그 품목은 뜻밖에도 쉽게 나타났다. 경북도지사를 지낸 김인씨가
느닷없이 박대통령을 찾아왔다.

"각하,이게 반도체라는 것인데 수출산업으로 크게 유망하다고 합니다"하며
한웅큼의 트랜지스터를 내 놓았다.

박대통령은 그후 김박사를 만났을때 "반도체라는 것이 정말
수출유망품목이오"라고 질문을 했다.

김박사는 진공관으로부터 반도체단계로 변해온 기술변천과정을 대략
설명했다. 그리고 관련공업이 발달되지 않아 어렵기는 하나 한번 해볼만한
산업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사업에 서정귀씨가 1백만달러를 투자하게 됐다. 곧
뉴코리어전자(주)를 설립(68년7월4일)하고 사장엔 김인씨가 취임했으며
서씨와 김박사는 비상임이사가 됐다. (김인씨는 69년 대만시찰단에도
합류했다)
새 회사는 부평에 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현지법인을
설립,그곳에서 기술과 마케팅을 해결키로 했다.

이 회사엔 박대통령의 관심이 대단히 커서 부평공장의 착공식과
준공식에는 물론 건설도중에도 한번 둘러 공장진입로의 포장을
경기도지사에게 지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초관심속에 발족하여 최초로 해외법인까지 두고 사업을 본격화
하려 했으나 새 회사는 가동에 들어가자마자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