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무잎처럼 한때는 찬연한 영화를 누리기도 하지만 때가 바뀌면
눈깜짝할 사이에 숨이 끊어져 허망하게 죽어 버리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평범한 진리를 잘알면서도 탐욕에
빠져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인간에게 탐욕은 한번 빠지면 바닥조차
없는 함정과도 같다.

그래서 은나라의 탕왕은 재물과 녀색을 탐하는것을 "음풍"이라고 해서
가장 나쁜 탐욕으로 규정하고 경사중 이 가운데 하나만 범해도 이마에
자자하는 묵형으로 처벌했다.

"성종실록"에는 꼭 이 묵형으로 다스려야 했을 공신들의 이야기 한토막이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다. 동지중추 이영은과 예조판서 김겸광이 한
처녀를 놓고 서로 첩을 삼으려고 다투다가 탄핵을 받는 내용이다.
공교롭게 이들은 둘다 좌이공신이었다. 1471년 9월의 일이다.

성주고을에 금은이라는 시골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천첩소생인
철비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먼저 이영은이 성주에 편지를 띄워 철비를
첩으로 들일 것을 약속했다. 이영은은 서울에 살고 있는 철비의 어미와도
철석같이 약속을 해두고 성주에 내려가 철비를 데려올 날만
기다리고있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김겸광이 잽싸게 선수를 처버렸다. 관찰사
오백창에게 청을 넣어 고을 수령에게 철비를 한양까지 압송하도록 한뒤
첩으로 삼아 버렸다.
여기서 끝나버렸다면 두 사람이나 알고 흐지부지 됐을 일이었으나
이영은은 그것을 보고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김겸광의 소행에 치를 떤
그가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철비를 김겸광의 집에서 끌어내려 했다. 철비
어미의 집을 감시도 시키고 자신의 사촌누이를 시켜 철비를 꾀어내도록
해보기도 했지만 일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김겸광이 이미 장가들었다해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만약 빼앗아 나를
주면 내가 다시 장가들겠다"고 그가 공언했다는 것을 보면 철비에 대한
이영은의 집념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욕심이 아무래도 채워질 가망이 없어지자 그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손수 고상을 써서 사촌누이를 시켜 사헌부에 고소했다.

이것이 발단이 돼 이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돼 버렸다. 사건이 공개되자
김겸광은 임금에게 상서해 사전에 이영은이 철비와 언약한 것을 전혀
몰랐다고 발뺌까지 하고 나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예조판서의 이런행위는 대간들의 미움을 사기에
족했다. 사간원 사헌부가 들고 일어나 이들의 파직과 중벌을 요구하자
난처해진 성종은 "풍기에는 관계되지만 저희들끼리 첩을 두고 다투는
것이지 국가에 관한 일이 아니니 논하지 말라"고 덮어버리려 했다.
임금이 공신인 이들을 비호하려한다는 것을 알아챈 간관들이 조용할리가
없었다. 사헌부 대사헌 한치형은 "사대부의 모범이 돼야할 지위에
있으면서 금수나 오랑캐같은 행동을 하니 백성들이 모두 오랑캐가 될까
두렵다"고 이들을 극렬하게 탄핵한뒤 파직시키고 중죄에 처하라고
상소했다.

그는 이 상소에서 철비의 자색이 뛰어나게 아름답지도 않고 다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농토와 노비(전민)가 넉넉할뿐이라는 조사결과를 낱낱이 들어
이영은과 김겸광은 철비보다 철비의 재산에 더큰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그 비루함은 말하기조차 망신스러운 일이라고 논죄하고 있다.

이 상소를 읽은 성종은 "대저 사람은 범한바가 있는데도 다스리지
아니하면 죄가 있는자는 기뻐하고 죄가 없는 자는 민망스러워 한다.
마땅히 국문하여 거짓과 참을 밝히라"고 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달남짓 조정을 시끄럽게 했던 이 사건은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이영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싱겁게 끝나 버린다. 저절로 김겸광의
판정승이 된 셈이다.

"사헌부에서 이영은에게 죄주기를 청하여 의금부에 옮겨 국문하자
이영은이 분이 발하여 졸하니 당시의 평론이 더럽게 여겼다"
사관의 장난기섞인 기록이 그의 판정패를 선언하고 있다.

목은 이색 현손인 이영은은 총명하고 글을 잘해 세조가 "특입"(많은
사람중 우뚝함)이라고 아꼈던 재사였다. 그러나 성품이 탐욕스러워
형조참판때는 뇌물받기를 좋아하는 오리로 이름나 있었다.

오로지 탐욕에 빠져 하찮은 일로 3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죽어버렸으니
"소빈대실"이란 격언이 무색할 지경이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