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의병장은 문석봉선생...보훈처서 공적인정/교과서 기록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을미사변이후 "최초의 의병장"이 문석봉선생으로 공식 인정돼
국사교과서에 기록되게 됐다.
유족들과 사학자들이 끈질긴 자료추적 결과 문선생이 구체적인
의병활동을 한최초의 의병장임을 확인,이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함으
로서 국가가 문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
키로 결정한 것.
이제까지 최초의 의병은 단발령이 공포된 1895년 12월31
일 다음날인 1896년1월1일 경기도 이천에서 봉기한 이천의병
(의병장 김하락)으로 알려졌으나 문선생에 대한 공적확인으로 최
초 의병봉기일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8월20일직후인
9월18일로 3개월이상 앞당겨진 셈이다.
의병은 일본이 1894년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뒤 친일내각을
구성,갑오경장을 실시한뒤 발생한 의병(갑오의병)이 최초이나 본
격적인 의병활동은 을미사변이후 봉기한 의병(을미의병)을 꼽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돼있어 문선생을 최초의 의병장으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따라서 문선생에 대한 독립장 추서는 이제야 비로소 한국의병사
가 제대로 정립될 기틀이 마련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1851년 12월 24일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출생한 문선생
은 고종 32년인 1895년 왜인들에 의해 명성황후시해사건(을
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에 분격해 9월18일 충남 대덕군 유성에
서 "의거토적"(의롭게 떨쳐일어나 왜인을 토벌한다)을 기치로
분연히 일어섰다.
최초의거 당시 3백명에 불과했던 의병이 수개월만에 1천여명으
로 불어났을 정도로 선생의 애국심과 영도력은 탁월했다.
문선생은 우선 회덕관아를 습격,신총 3백정과 대검등을 빼앗아
의병들을 무장시키고 선봉장에 김문주,중군장에 오형덕을 임명해
진용을 정비했다.
문선생은 진장을 거쳐 공주로 진군하다 10월28일 일본군,관
군의 연합군과 맞서 싸운 공주전투에서 패전,첫 시련을 맞았다.
국사교과서에 기록되게 됐다.
유족들과 사학자들이 끈질긴 자료추적 결과 문선생이 구체적인
의병활동을 한최초의 의병장임을 확인,이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함으
로서 국가가 문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
키로 결정한 것.
이제까지 최초의 의병은 단발령이 공포된 1895년 12월31
일 다음날인 1896년1월1일 경기도 이천에서 봉기한 이천의병
(의병장 김하락)으로 알려졌으나 문선생에 대한 공적확인으로 최
초 의병봉기일이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 8월20일직후인
9월18일로 3개월이상 앞당겨진 셈이다.
의병은 일본이 1894년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든뒤 친일내각을
구성,갑오경장을 실시한뒤 발생한 의병(갑오의병)이 최초이나 본
격적인 의병활동은 을미사변이후 봉기한 의병(을미의병)을 꼽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돼있어 문선생을 최초의 의병장으로 인정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따라서 문선생에 대한 독립장 추서는 이제야 비로소 한국의병사
가 제대로 정립될 기틀이 마련됐다는 의미를 지닌다.
1851년 12월 24일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출생한 문선생
은 고종 32년인 1895년 왜인들에 의해 명성황후시해사건(을
미사변)이 일어나자 이에 분격해 9월18일 충남 대덕군 유성에
서 "의거토적"(의롭게 떨쳐일어나 왜인을 토벌한다)을 기치로
분연히 일어섰다.
최초의거 당시 3백명에 불과했던 의병이 수개월만에 1천여명으
로 불어났을 정도로 선생의 애국심과 영도력은 탁월했다.
문선생은 우선 회덕관아를 습격,신총 3백정과 대검등을 빼앗아
의병들을 무장시키고 선봉장에 김문주,중군장에 오형덕을 임명해
진용을 정비했다.
문선생은 진장을 거쳐 공주로 진군하다 10월28일 일본군,관
군의 연합군과 맞서 싸운 공주전투에서 패전,첫 시련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