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수출실적 1천4백만$/92년의 5천분의1수준...통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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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직후인 48년 우리나라의 수출은 1천4백39만2천달러로 92년(7백66억3
천1백51만5천달러)의 5천분의1 수준이었으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금의
8백33배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45년말 남한의 총인구는 1천6백87만명으로 올 7월1일의 인구(4천4백5만
명)의 38.3%에 불과했으나 실업자는 79만8천명(47년말)으로 92년말 46만
4천명의 1.7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2일 통계청이 광복 48주년을 앞두고 발표한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
사회상"에 따르면 47년 연간 쌀생산량은 1천3백85만섬으로 92년(3천7백2만
3천섬)의 37.4%에 머물렀으며 당시의 정부추곡수매가(60kg 한가마에 1천9백
60원)가 싯가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한 탓에 많은 농민이 정부수매에 불응,
정부에 추곡수매를 더 늘려달라고 요구하는 요즘과는 대조를 보였다.
광복직전인 44년 서울인구는 98만9천명으로 남북한 전체인구의 3.8%였으며
광복당시에는 일본인의 출국때문에 85만명으로 줄었다가 92년 현재는 1천만
명을 상회,남한전체인구의 4분의1을 차지하고 있다.
실업자는 공식통계로는 47년에 79만명으로 조사되어 있으나 확인미상자가
많아 실제 실업자는 약 1백50만명으로 추산됐다. 취업자중 약80%가 농림어
업에 종사했고 일정한 직장없이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간 사람도 전체의
6.9%인 43만5천명이나 됐다.
당시에는 물가는 폭등하고 임금은 낮아 생활이 크게 핍박을 받았는데 방직
여공의 월소득이 3천5백59원으로 당시 물가사정상 보리쌀 1말과 밀가루1부
대를 사고나면 왕복전차료(10원)도 안되는 9원이 남았다. 48년 당시직종별
임금은 월급여로 환산할경우 목수가 1만2천62원으로 가장많았고 전문대 졸
업후 3년정도의 회사원이 9천2백50원,공무원이 4천3백80원,면방직여공순으
로 많았다.
광복되던 해 하반기의 물가는 광복전에 비해 25배나 올랐는데 이는 당시사
회가 혼란했던데다 생필품이 절대 부족한데 따른 것이다. 양말 고무신은 8
명당 1켤레,비누는 3명에 1개꼴로 공급되었으며 식량부족이 심했던 탓에 하
루에 한사람에게 2홉5작의 배급도 제대로 못했다.
생활물자부족과 함께 통화량은 광복직후 2년4개월동안 6.7배나 늘어나 최
근수준보다 약16.8배나 팽창률이 높았다.
광복후 남한의 13세이상 인구중 한글미해독자는 77%에 이르렀고 15세이상
인구중 국민학교나 서당수업조차 받지못한 불취학인구가 81%인 1천1백10만
명이었다. 또 전문대이상 학력자는 2만9천4백38명으로 15세이상 인구의 0.2
%로 90년의 5백56만명(17.2%)과 대조를 보였다.
45년에 등록된 자동차는 7천3백26대로 이중 절반은 폐차에 가까웠으며 48
년에 1만4천7백8대로 늘긴했으나 93년4월말(5백56만4천대)에 비하면 4백분
의1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전화가입자는 46년 1천명당 1.9대에서 94년4월에
1천명당 3백57대로 늘어났다.
천1백51만5천달러)의 5천분의1 수준이었으며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금의
8백33배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45년말 남한의 총인구는 1천6백87만명으로 올 7월1일의 인구(4천4백5만
명)의 38.3%에 불과했으나 실업자는 79만8천명(47년말)으로 92년말 46만
4천명의 1.7배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2일 통계청이 광복 48주년을 앞두고 발표한 "통계로 본 광복전후의 경제.
사회상"에 따르면 47년 연간 쌀생산량은 1천3백85만섬으로 92년(3천7백2만
3천섬)의 37.4%에 머물렀으며 당시의 정부추곡수매가(60kg 한가마에 1천9백
60원)가 싯가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한 탓에 많은 농민이 정부수매에 불응,
정부에 추곡수매를 더 늘려달라고 요구하는 요즘과는 대조를 보였다.
광복직전인 44년 서울인구는 98만9천명으로 남북한 전체인구의 3.8%였으며
광복당시에는 일본인의 출국때문에 85만명으로 줄었다가 92년 현재는 1천만
명을 상회,남한전체인구의 4분의1을 차지하고 있다.
실업자는 공식통계로는 47년에 79만명으로 조사되어 있으나 확인미상자가
많아 실제 실업자는 약 1백50만명으로 추산됐다. 취업자중 약80%가 농림어
업에 종사했고 일정한 직장없이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간 사람도 전체의
6.9%인 43만5천명이나 됐다.
당시에는 물가는 폭등하고 임금은 낮아 생활이 크게 핍박을 받았는데 방직
여공의 월소득이 3천5백59원으로 당시 물가사정상 보리쌀 1말과 밀가루1부
대를 사고나면 왕복전차료(10원)도 안되는 9원이 남았다. 48년 당시직종별
임금은 월급여로 환산할경우 목수가 1만2천62원으로 가장많았고 전문대 졸
업후 3년정도의 회사원이 9천2백50원,공무원이 4천3백80원,면방직여공순으
로 많았다.
광복되던 해 하반기의 물가는 광복전에 비해 25배나 올랐는데 이는 당시사
회가 혼란했던데다 생필품이 절대 부족한데 따른 것이다. 양말 고무신은 8
명당 1켤레,비누는 3명에 1개꼴로 공급되었으며 식량부족이 심했던 탓에 하
루에 한사람에게 2홉5작의 배급도 제대로 못했다.
생활물자부족과 함께 통화량은 광복직후 2년4개월동안 6.7배나 늘어나 최
근수준보다 약16.8배나 팽창률이 높았다.
광복후 남한의 13세이상 인구중 한글미해독자는 77%에 이르렀고 15세이상
인구중 국민학교나 서당수업조차 받지못한 불취학인구가 81%인 1천1백10만
명이었다. 또 전문대이상 학력자는 2만9천4백38명으로 15세이상 인구의 0.2
%로 90년의 5백56만명(17.2%)과 대조를 보였다.
45년에 등록된 자동차는 7천3백26대로 이중 절반은 폐차에 가까웠으며 48
년에 1만4천7백8대로 늘긴했으나 93년4월말(5백56만4천대)에 비하면 4백분
의1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전화가입자는 46년 1천명당 1.9대에서 94년4월에
1천명당 3백57대로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