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생활을 한다는 설레임과 불안을 가슴에 안고
87년8월 서른다섯의 나이에 처자를 거느리고 코넬대학이 있는 미국
동북부의 조그마한 도시 이타카에 도착했다.

18인승 프로펠러기에서 내려보니 과학원 후배인
정교방박사(삼성종합기술원)가 공항에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정박사집에서 저녁을 먹고 첫밤을 보냈다. 밖이 환해 눈을 떠보니 그
다음날 11시였다. 두런 두런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밖에 나가보니
이타카에는 한국 식료품점이 없어 시라큐스등 근처 큰도시에서 한달에
한번씩 단체주문을 하여 쌀 김치 라면등을 사먹고 있었은데 그날이 바로
장날이었다.

기숙가 고참들에게 바로 어제 한국에서 도착한 아무개라고 소개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만난 이대창박사(기아경제연구원)는 우리
식구들을 호수가 공원으로 데려가 김치와 상추를 곁들인 불고리를 포식시켜
주었다.

87년 당시 코넥대학에는 한국 학생들이 30명이 넘었는데 기혼자
대학원생을 위한 해스브룩 아파트에 입주한 유학생들로는 필자(법학)외에도
식품공학의 임상빈(제주대),전자공학의 신현덕(데이콤),유전공학의 안상락
김주곤(농진청),도시계획의 김의준(국토개발연구원)등이 있었다.

전공도 다르고 한국에서의 직업도 각양 각색이었으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미국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이었다. 부인들은 넉넉치 못한
살림때문에 베이비 시터 노릇을 하기도 하고 남편들은 귀도 채 뚫어지지
않고 입도 안떨어진 채로 강의실에 앉아 교수가 질문하면 어떻게 하나
가슴졸이며 일주일을 보내고 금요일 저녁이 되면 모여앉아 실컷 한국말을
하곤 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로의 어려움을 터놓고 또 격려해 주면서
용기를 얻었다.

특히 초창기의 우리 87년 입학생들을 여러모로 이끌어 주고 격려해준
선배로 김성국박사(코넬대)와 인해욱박사(호주 뉴잉글랜드대)를 잊을수
없다.

입학은 모두 같은해에 하였으나 각자의 전공분야 연구실의 기풍등에 따라
앞서거니 뒷서거니 졸업을 하고 올1월 안상락박사를 끝으로 모두
귀국하였다. 귀국후에는 같은 기숙사에 살던 이전처럼 자주 모이지는
못하지만 회원들이출국하거나 귀국할 때등 수시로 만나 근황과 모교소식을
나누기도 한다.

근해 코넬대학의 한국유학생 수가 서서히 줄고 있다는 소식이다.
국내에서의,고학력자의 취업난이 그 원인이겠으나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화발전을 위하여 더욱 절박하게는 기술개발능력의 지속적 향상을
위하여,힘들고 도되더라도 유학생활에 도전하려는 후배들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