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사는 서울 왕십리에서 종업원19명을 두고 봉제의류를 생산하는 소기업.
이회사는 금융실명제와 관련,17일 오전 거래하던 도매업자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K사는 물품대금으로 2천8백만원을 받을것이 있었는데 도매업자는 "현찰로
수령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K사의 P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2천8백만원을 현찰로 받으라니 납득키
어려웠다. 도매업자는 그러면 1천5백만원은 수표로,나머지는 현찰로 받아
달라고 애원했다. P사장은 그렇게 받았다.

다음날 도매업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재차 전화를 걸어왔다. 수표로 건네준
1천5백만원을 현금으로 교환하자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부탁
을 들어달라."는 말에 P사장은 그렇게 했다. 도매업자는 전화말미에 당분간
거래는 힘들 것이라는 말도 잊지않았다.

이 해프닝의 뒤편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당초 K사는 도매업자와 계산을
해왔지만 "계산서"는 소매업자에게 끊어 주었던 것이다. 이른바 무자료거래
를 해온 것이다. "실명"의 위기의식을 느낀 도매업자가 수표추적을 우려해
빚어진 일이다.

금융실명제 충격은 이런 부문에까지 미치고 있다. 사채시장의 동결에 따른
자금시장의 위축이란 "파도"도 문제지만 경제저변의 상거래에서도 "물살"이
일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중동"인 것이 실명제실시 이후의 중소업계 표정이다.
그렇지만 단지 뚜렷이 대처할 방안이 없어서 폭풍전야의 고요속에 싸여
있다는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같은 상황은 종업원 임금 등 월말 자금수요가 폭증하는 다음주에는
"실제상황"으로 돌변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월말의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가 문제이다.

실명제의 여파가 영세소기업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돈이
안도니 영업활동전반이 크게 위축돼가고 있다.

청계천 방산시장에서 의류부자재를 생산하는 T사. 이회사는 18일 1천7백
만원의 어음을 어렵게 결제했다. 받을 어음 2천만원과 현금 8백만원이
있었으니 종전 같으면 걱정거리가 아니었으나 이날은 사정이 달랐다.
실명제 한파가 차가웠다.

사채시장에서의 할인은 소문대로 안됐을 뿐만 아니라 평소 회사 금고처럼
이용하던 상조회에서도 외면당했다. 평소 2천만~3천만원은 상조회에서 신용
대출을 받아왔던 터였다.

이회사는 사장친지로부터 급전을 구해 "위기"는 간신히 넘길 수 있었다.
받을 어음이 많아도 소용이 없어졌다고 회사관계자는 하소연하고 있다.
더구나 앞으로 어음거래가 위축된다면 판매가 줄어들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느냐고 그는 덧붙였다.

"어음이나 수표는 사절합니다."라는 일시적인 상거래의 변화는 제조업체들
의 생산위축으로 번지고 있다.

경기도 부천에서 화장지를 생산하는 K사. 화장지 원단을 제지업체로부터
공급받아 두루마리나 티슈등 을 생산,영세상인이나 최종소비자를 상대로
판매를 해온 이회사는 세원노출을 꺼린 상인들때문에 판매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

이회사는 전체매출의 40%정도는 무자료거래를 해왔는데 실명제실시 여파로
매출이 30%는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회사측이 영수증 거래를
원해도상인들이 이를 꺼릴 경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회사관계자는 전국 1백여개 화장지업체의 처지가 비슷할 것이라고 귀띔
한다.

서울 성수동에서 기계를 제작하고 있는 H사도 사정은 마찬가지.
부품업체들이 어음대신 현금을 요구해오고 있다며 공장을 놀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설명이다.

주문제작하고 있는 이회사는 결제조건을 이유로 부품이 제때 들어오지
않는데 납기를 맞추기는 애당초 어렵지 않으냐고 되묻는다. 당장 내달
납품분부터 타격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목재업체들의 생산위축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인천에 있는 B사는
"실명제실시이후 세원노출을 꺼린 원목구매업체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며
"특히 종전에 수천만원씩 구매하던 업체들도 기껏 수백만원어치를 사가는게
고작"이라고 말한다. 계절적인 비수기까지 겹쳐 목재업체들은 매출이 큰
폭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완구나 봉제 등 가내수공업 형태로 운영하던 영세 소기업들은 애당초
무자료거래가 관행화 돼있었던 터라 실명제의 여파가 크다. 완제품 의류
생산업체도 줄줄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우려가 팽배해 있다.

중소업계의 실명제충격은 1차적으로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의지할데없는
영세소기업을 중심으로 실명제한파가 "목감기"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독감"수준으로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한파가 중기업
중견기업까지 넓고 깊게 퍼져나갈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중소기업 경영자들은 오히려 담담하다. 경기도 반월공단에서 기계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D사의 L사장은 "하루벌어 하루살아가는게 중소기업이
현실이었다."며 "공은 정부가 쥐고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특단의 조치로 나온 실명제인 만큼 정부가 빠른 후속조치를 취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중소기업들은 그동안 변혁기때마다 정부가 중소기업을
위한 특별자금을 푼다고 법석이었지만 실질적인 수혜기업은 많지않았다고
주장한다.

설사 대출이 된다해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자금흐름상 시기를 놓칠 가능성
이 높다. 따라서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달라는 것이 요즘 중소업자들의
"작은 소망"인 셈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참고서"라도 구해봤으면 좋겠다. 모든 상황이
처음 맞는 것이라서 전략을 세운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전자부품메이커인 H사의 J사장은 실명제현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중소업계는 실명제실시를 계기로 담보위주의 대출관행철폐 은행에서의
진성어음전액할인 대기업의 신속한 납품대금지급등 장기적인 개선책을
외치기보다는 당장의 어려움해결을 먼저 토로하고 있다.

<남궁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