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진짜 고통받고있는 사람은 20여명에 불과할것입니다"
"3개월정도만 지나면 안정될 것입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고 1주일쯤 지난 어느날 경제정책을 책임지고있는
각료중의 한 사람이 의기양양하게 한 말이라고 한다.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실명제실시를 주도적으로 했다해서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일면도 보였다고 들린다. 이를 전해 듣는 순간 무척 당황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지나친 낙관과 자만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아닌
경제관료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는데 더욱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명제의 본질과 파급효과를 잘 모르고 있거나 알았다면 베일에
가려진 뇌물수수나 정치자금거래의 실체를 벗기는 것쯤으로 생각한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실명제에 대한 정부의 자세는
너무 낙관으로 일관하고 있어 큰 문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실명제실시로 인한 경제적 파급영향은 아직 완전히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나타나고있는 부작용들은 충격적 조치에
대한 놀라움과 장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그로인한 자금흐름의 애로가 그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것인지, 기업의
생산활동이나 소비자들의 행태변화등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등은 아직도
유보된 상태라고 보는것이 옳다.

본격적인 파급영향은 실명전환의무기간이 끝나고 무엇을 어떻게 할것이냐
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판단이 서고난 뒤부터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또 그 판단은 하루 이틀에 이뤄지는것도 아니다. 실명제실시이후 나타나는
정치 경제 사회등 모든 분야의 변화를 조망하면서 서서히, 그것도 소리없이
이뤄지게될 공산이 크다. 이러한 장기적 파급영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
이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가름된다고 보면 정부의 성급한 낙관이 얼마나
위험스런 일인지 짐작할수 있다.

그 중에서도 돈의 흐름이 어떻게 변할것이냐가 가장 큰 관심사일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동안 그늘에 숨어있던 돈들이 기왕에 노출됐으니 떳떳하게
생산적인 투자에 나서겠다고 한다면 국민경제의 차원에서 최선의 선택이
될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명제실시 그 자체만으로 이러한 최선의 선택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돈이 그쪽으로 흐를수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한다.

돈이 건전하게 흐를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면 그 흐름은 엉뚱한
곳으로 길을 돌리게 될 것이다. 과거의 관행과 사고가 바뀌지않은
과도기적 불안정한 경제상황에서는 일종의 성취욕같은 것이 손상당할수도
있다. 편히 먹고 편히 살자는 무기력증도 나올수 있다.

여기에 단기적으로 물가불안요인까지 도사리고 있다. 실명제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돈을 풀수 밖에 없고 이는 물가불안요인이
될것은 뻔하다. 이런 저런 일들이 한데 어우러지면 그 결과 또한 예측할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크다. 유통시장에서의 행태변화나 또다른
악성 지하경제의 잉태소지도 전혀 배제할수 없는 걱정거리중의 하나다.

바꿔말하면 실명제실시로 인해 새로운 경제질서가 태동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쪽이냐,아니면 나쁜쪽이냐 하는 것은 국민들의 애국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규제나 단속에의해 판가름나는 것도 아니다.
경제여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동조절되는 것이다. 사정차원의
과거들추기보다는 돈의 흐름을 건전하게 유도하기 위한 여건조성에 정부의
보다 진지하고 진취적인 자세가 아쉽다.

본질적인 금융실명제는 아직 시행도 되지 않은 상태다. 거래실명화는
초보적인 단계에 불과하다. 궁극적 목표인 긍융소득종합과세제실시가 남아
있다. 종합과세가 시행되면 보다 큰 질서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난한 셈이다.

"더 이상의 추가 보완대책은 없다"
어찌보면 강압적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이러한 불필요한 말들이 어째서
고위당국자들 입에서 오르내리는지 의아스럽다. 기왕에 가야할 길이라면
좀더 편안하게,그리고 조금이라도 빨리 갈수있는 길을 국민들과 함께
찾는데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다.

정책에 대한 자신과 자만은 천지차이다. 자신감은 신뢰가 수반되지만
자만감에 차있을 때는 의심과 방관만이 팽배해진다는 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