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배반자사야". 이 엉터리 한문을 굳이 번역하자면 "남에게
기대를 안겨주고 이를 배반한 자는 사형에 처함이 마땅"이라고나 할까.
20여년전 내가 젊은 나이에 공무원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할때 직장의
선배가 처음해준 말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의식 무의식간에 명확한 약속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방으로 하여금 강한 기대를 갖게하는 언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 상대방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기대의 실현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기정사실화한 다음,이를 바탕으로 행동을 하고 미래를 계획함으로써
깨뜨리기 힘든 질서를 만들게 된다. 나중에 기대를 저버리게 되면 기대의
연결고리가 도미노현상처럼 부서지면서 엄청난 혼란과 반발을 일으키게
된다. 신뢰감이나 예측가능성의 상실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심한 배반감과
분노를 느낀다.

개인의 경우가 아니라 이것이 정부정책의 하나로서 행해졌을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가령 정부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장기저리로 무기명채권을 발행키로
했다고 하자. 시장의 실세금리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무기명채권을
발행,소화하고자 할때는 이를 발행하는 측이나 매입하는 사람사이에는
묵시적인 양해 내지는 기대가 형성되어 있다. 즉 소지인에 대해서는
만기에 이르러,적어도 발행일부터 만기일까지의 소지여부를 따지지 않고
자금 출처도 조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약속이다.

법상으로는 아니더라도 명시적인 관행으로서 합리적 기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정부가 법대로 따지겠다고 한다면 이미 이를 산 사람이
이중의 부담을 받게되는 것은 물론이고 금융시장전체가 혼란속에서
표류하게 된다.

금융실명제와 같은 제도개혁은 이러한 기대가능성 그 자체를 과감하게
단절하려는 강력한 정책의지이다.

따라서 이로 인한 어느정도의 충격과 혼란은 극복해 나가겠다는 의지
또한 강하다. 그럴수록 정책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기대배반이
가져올 치명적인 신뢰의 훼손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