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난정이 한번 할퀴고 지나간 나라의 상처는 깊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뒤에 임금이 되는 자는 중흥의 성군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염원때문에 항상 전전긍긍하며 그 상처를 치유해 가야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옹립된 중종은 즉위초부터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하며
임금의 자리를 지켜갔다. 그러나 임금의 이런 자세와는 달리 반정공신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럽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많은 자는 6~7명,적은자도
3~4명의 희첩을 거느렸다. 소실의 집을 마련해주고 집넓히기와 재물
거둬들이기에 혈안이 돼있었다.

그래서 당시 항간에서는 "소가구황"(소실을 먹여살린다)이란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렇듯 대신들의 생각이 딴곳에 쏠리다보니 조정의 정책이나 법령도
뒤죽박죽이었다.

아침에 영을 내렸다가 저녁에 번복하고 어제 법을 세웠다가 오늘 폐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법은 사흘이면 폐지된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정책을 결정할때도 한 대신이 옳다고 하면 다른 대신이 반대하고 나섰다.
대신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 일이 없었다. 임금은 믿을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다"는 옛말이 꼭 맞는 시대였다.

중종은 세세한 일까지 손수 점검하기 시작했다. 죄인의 형량을 결정해
올리도록 하고 심문내용을 일일이 검토한뒤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었다.
궁내의 장부들까지도 모두 살펴보고 결재했다. 자신이 내리는 전지중
글자한자만 틀려도 다시 고쳐 쓰도록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철저하게
"확인행정"을 했던 모양이다.

"까다롭게 살핀다" "너무 지나치다"는 평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일이 더 잘 처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세심하게 따지고 들면 들수록
신하들은 눈가림만 하러 들었고 제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즉위이래 8년째 계속 흉년이 잇달아 도처에서 백성들이
굶어죽는다는 소식만 날아들자 중종은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그무렵 실녹에는 대간이 간하면 무조건 "윤허하지 않는다"는 i
대답만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중종8년(1513)5월. 중종은 아주 사소한 사건하나때문에 사헌부의 관원
모두를 갈아치우라는 명을 내렸다.

충찬 송장손이 어미를 구타하고 종친과 사귀어 정을 통했다. 또 도박을
일삼고 기생 월중계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았다. 장손을
10여차례나 추국한 결과 자백을 얻어냈고 관련자들을 심문하자 그의
죄과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런데도 사헌부에서 다시 관련자들을
불러다 재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한명이 곤장을 맞아 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근래 관리중에 국법을 멋대로 휘두르는 자가 간혹 있다. 임금이 앉아
보기만 하고 먼저 그 관리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는 백성을 악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만도못하다. 사헌부가 죄인에게
사정을 두어 무죄인 사람을 고문해 죽게했으니 휼형의 뜻이 어디 있는가.
만약 타사의 실수라면 법사가 죄줄것을 청할 것이로되 법사가 먼저
실수하였으니 과인이 책임을 묻지 않을수 없다"
노한 그는 모든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헌부 관원들을 모두 갈아
치우라"고 명령했다.

사헌부는 한나라의 풍헌을 바로 잡는 기관이다. 대사헌을 위시한
관원들은 임금의 이목지관임을 자부하고 있는터에 임금으로부터 "사정을
두었다"는 의심을 사게됐으니 조정이 조용할리 없었다. 로모봉양이나
건강을 이유로 물러나겠다는 재상들의 사직소가 잇달았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부제학 박소영이 세번씩이나 상소를 올렸다.
"옛말에 의심이 나면 맡기지 말고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갓 유사의 일에 심력을 쓰시니 장차 누가 전하께서 정치의 근본을
아신다고 이르겠습니까"
박소영은 중종이 정치의 근본을 모른다고 일침을 놓은뒤 참된 정치가는
남에게서 취하여 자신을 돕고 자신을 살펴 남을 용서하는 것이 학문중의
학문이라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고 차분하게 진언했다.

박소영의 상소를 읽은 중종은 내심은 어쨌든 "상소한 뜻이 나의 병통에
맞는다"고 승복했다고 "중종실록"에 기록돼있다.

"상은 인자하고 유순한 면은 남음이 있었으나 결단성이 부족하여 비록
일을 할뜻은 있었으나 일을 한 실상이 없다"
철인정치를 꿈꾸었으나 우유부단한 성품때문에 39년이나 재위하면서도
중종이 나라의 중흥을 이루지 못한 이유를 사신은 이렇게 정확하게 적어
놓았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