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년전쯤. 은행창구직원의 책상에는 주판이 놓여 있었다.
기업이나 관공서의 "돈"을 다루는 부서에서도 주판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전자계산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그전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주판이 같이 사용됐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사이 주판은 골동품으로 변하고
그 빈자리를 전자계산기가 채우고 있다. 책상 한자리를 지키던 주판은
박달나무로 만들어졌지만 계산기는 "딱딱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다.
그만큼 따듯함도 줄어들고 있는것 같다.

주판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은 전자계산기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등으로
상징되는 사무자동화. 사무자동화의 밀물은 주판은 물론 1백원짜리
볼펜에서 등사원지 장부 먹지 타자리번 편지봉투 원고지등에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의 "수명"을 재촉하고 있다.

이처럼 상품의 수명이 산업발달의 물살에 휩싸이면서 관련업체들의
부침도 거듭되고 있다. 기업이 "효자상품"의 퇴장으로 도산하는가 하면
신규품목을 육성해 사업다각화로 거듭나기도 한다. 주판의 경우 그나마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기업은 한국산기(대표 김정환)단 한곳.
이회사는 80년대초까지만해도 "옥산주판"이란 브랜드로 월간 3만개가량의
주판을 생산해왔다. 그러던 것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지금은 고작
월간 6천개정도를 "마지못해"만들어 내고 있다.

마지못해 만든다는 것은 "계산"이 안나온다는 얘기. 소수의 소비자를
위하고 주판산업의 명맥을 잇는다는 명분때문에 생산은 하고 있으나
채산성은 없다고 회사측은 잘라말한다. 이회사의 김전교상무(54)는 "요즘
상고에서도 주판교육이 없어지고 있는 추세"라며 "주판을 사용하는 시대는
이미 종을 친 느낌"이라고 말한다. 한국산기는 이에따라 지난 91년부터
6개의 주판라인을 1개로 축소하고 제도판 평형제도기등 제도용품
전문생산업체로 변신하고 있다.

우리나라공산품 역사의 한자락을 차지하는 (주)모나미의 "153볼펜"도
대체필기구의 출현과 고가제품선호경향등이 맞물려 퇴장의 수순을 밟고
있다.

지난 63년 시장에 첫 선을 보인 1백원짜리 볼펜이 시장에서 사라질 날도
멀지않았다는 추측이 나온다. 모나미는 "153볼펜"이 피크를 이룰때는 월간
8백60만개씩이나 판매됐으나 지금은 4백50만개수준으로 뚝 떨어졌으며 특히
채산성을 따진다면 "불효자"가 된지 오래라고 설명한다. 이회사도 사인펜
매직 노트류 팬시제품등으로 불효자가 된 "장남"의 몫을대신하고 있다.

등사원지나 먹지도 복사기의 등장으로 추억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전표
부기장등 장부류도 사무자동화의 거센 물결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다.
타자리번을 만드는 기업들도 타자기가 개인용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에
자리를 빼앗긴뒤 타의에 의해 컴퓨터리번생산업체로 변신했고 앞으로는
컴퓨터의 발전에 따라 또다른 변신을 강요받아야할 입장이다.

편지봉투도 통신판매용으로 쓰이는 컴퓨터용지봉투와 겉에 비닐을 따로
붙여안을 들여다 볼수있게 고안된 창봉투등 "신세대"봉투가 일반봉투의
자리를 급속히 뚫고든다. 원고지도 전업작가나 기자등 단골손님들로 부터
따돌림을 받고 학생들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문구류의 "운명"에서 빠르게
변천하는 산업사를 볼수 있을것 같다.

<남궁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