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를 뒤치다꺼리 하는라 돈줄관리를 사실상 포기한 한은이 앞으로도
당분간 돈관리를 느슨하게 할수 밖에 없다는 원칙을 밝혔다. 앞으로 실명제
의 여파가 어떻게 나타날지도 모르고 2단계금리자유화라는 부담스런 조치를
추진해야하는 상황이기에 어쩔수 없다는 설명으로 지금과 같은 신축적인
통화공급 기조유지의 명분을 살렸다.

물론 한은이 연초에 세운 통화공급목표 17%를 지키기위해 이달 돈줄을
죄기에는 물리적으로도 어려운게 사실이다. 지난달 평균잔액통화증가율이
21.4%에 달한 반면 말잔 증가율은 25%까지 치솟아 이달들어서 증가율을
낮추는데는 많은 부담이 따른다.

한은이 통화목표준수에 애착을 갖고 하향조정쪽으로 방향을 정한다면 기업
과 금융기관들에 심리적 압박을 가중시킬 공산이 크다. 특히 금융시장
에서는 실명전환의무기한이 끝나는 12일이 지나고 나서 한은이 어떤 자세를
보일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왔다. 자금시장의 좋고 나쁨은 전적으로 돈줄을
쥐고있는 측에 달려있어서다.

한은은 이같은 시장분위기를 감안해 풀린 돈을 죄는 방안은 당분간
선택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시장분위기도 그렇지만 돈줄을 관리할 만한 여건도 그다지 좋지 않다.
실명제의 여파와 2단계자유화가 바로 걸림돌이다.

지난 8월13일 실명제를 실시한 후 사채시장이 위축되고 중소기업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충격파가 나타날지도 예측 불가능하다.
기업들은 잔뜩 웅크려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통화를 죄겠다고
나서기가 그리 쉽지 않은 편이다.

연내에 시행할 2단계자유화조치도 통화부문에서 한은을 곤혹스럽게 하는
요인이다.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자유화로 금리가 뜀박질 할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이 제목소리를 낸다며 통화증가율 하향조정을
외치고 나서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유시열 한은이사는 "전반적인 상황이 통화의 긴축운용을 어렵게 하고있다"
며 이같은 현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풀린 돈이 시간이 지나면서 물가를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앞에
이같은 현실호소가 과연 통할수 있을지. 5,6일 이틀간 열린 한은에 대한
재무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도 이문제가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각됐다.

재무위원들은 한은의 여유있는 통화공급이 이미 9월말현재 기준으로
4.9%(소비자물가기준)나 올라있는 물가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며 김명호
총재를 질책했다.

최근 우리경제는 경기침체속에 물가만 오르고있는 형국이다. 그나마
올해는 공산품가격을 거의 동결하다시피 했고 임금인상도 어느정도 절제
했다. 내년에는 눌러온 가격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 가능성이 높다. 실명제
의 조기정착 명목으로 풀고있는 돈이 연말을 지나 내년으로 이어지면서
물가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우려가 고조되고있는 시점이다.

한은은 이와관련,실명제로 돈의 돌아가는 속도(유통속도)가 떨어져
절대공급량이 늘더라도 당장 물가상승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이한 자세를 보이고있다. 그러나 돈의 흐름이 더뎌진 것은 일시적이다.
곧 정상을 되찾아 예전의 속도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 물가상승도 그때
가시화될 것이다.

이런점에서 지난달 통화를 월간기준으로 3년4개월만의 최고치인 21.4%까지
늘리고 이달에도 낮추려는 노력없이 22%까지 운용하겠다는 느슨한 입장을
밝힌 것은 한은이 고유업무를 팽개친 꼴이라고 지적할수 밖에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달 자금사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한은은 전망하고 있다.
자금수요가 부가가치세(25일 2조원정도)외에는 뚜렷한게 없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실명전환의무기한이 지나고 나서 금융시장에 예상치못한 변화가
생기고 제도권에서 빠져나간 자금이 제대로 환류되지 않을 경우 악화될수도
있다.

한편 추석전 열흘간 풀려나간 현금통화 3조4천5백25억원중 지난 2,4,5일
사흘간 한은이나 은행권으로 돌아온 돈은 1조9천8백72억원으로 환수율이
58%(추석후 사흘간 기준)에 달했다. 이를두고 한은은 "순조롭다"고 평가
하고있다. 그러나 작년 같은 시점에 비하면 환수율이 3%포인트 낮다.
지금까진 그런대로 환수가 된다고 말할수 있으나 앞으로가 문제다.

<고광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