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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사만록] 하늘이 성인의 손을 빌려.. .. 고광직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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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족이 전세계에 자랑할수 있는 것들 가운데 으뜸으로 꼽을수있는것은
    무어니 무어니해도 역시 "한글"이다. 세계 문자사의 큰 흐름을 보면
    이웃나라에서 쓰는 문자를 받아들여 조금 고쳐서 쓰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글은 문자의 계통으로 보아서는 어떤 문자로부터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않고 독창적으로 창안된 문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정인직가
    "훈민정음해례"서문에서 "정음지작 무소조술 이성어자연"(정음은 어떤
    계통을 이어 받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이라고
    표현한것도 그런뜻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한민족의 멀었던 눈을 활짝뜨게 해준 "훈민정음창제"
    라는 대사업을 누가 언제부터,어떤과정을 거쳐 수행한 것인지에 대한 초기
    기록이 전혀없다. 훈민정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장헌대왕실록"
    (세종25년12월30일조)에 다음과 같이 창제 사실을 밝히고 있는 기사로부터
    시작된다.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28자를 만드셨다"(시월 상친제언문 28자)
    이런탓으로 현재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은 세종이 중심이 되고 신숙주
    성삼문 정인직등 몇몇 집현전학자들이 협력해 창제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있다. 국민학교 교과서는 물론 각종 사전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주시경같은 선구적 국어학자도 그렇게 믿고있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왕조시대에는 신하들의 업적도 임금에게 돌리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만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그런
    주장들은 아무 근거도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앞서말했듯 훈민정음 창제가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25년(1443)말의
    일이고 정식으로 반포된것은 세종28년(1446)9월(음력)의 일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1443년 이전에 만들어진것이 확실한데 그때 세종을 누가
    도왔다거나 그의 명을 받아 이 일을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은
    아무데서도 찾아볼수 없다. 집현전의 일부 학자들이 훈민정음과 관련된
    일에 참여한것은 세종26년(1444)2월 왕명으로 시작된 "운회"의 번역이
    처음이다. 반대상소가 나오는 것도 그 직후의 일이다. 언문청이라는
    기관도 그 이후에 설립됐다. 공표되기 전까지 정음의 창제사실은 철저하게
    숨겨졌었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당시의 문헌들은 한결같이 그것이 세종의 "친제"임을
    기록하고 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의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정린직 훈민정음 서문)

    "아아,정음이 만들어짐에 천지만물의 이치가 갖추어지게 되니 그
    신묘함이여. 이는 거의 하늘이 성인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 손을 빈
    것이고녀"(훈민정음해예)

    "내 이를 위하여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노니."(훈민정음 어제서)

    특히 세종26년 최만리등이 올린 반대상소를 보고 세종이 진노해 이들을
    "무용지속유"라고 힐책하면서 했다는 말은 훈민정음이 "친제"임을 한층더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독를 만든 본뜻이 곧 편민을 위한 것이 아니냐. 편민으로 말하면
    지금의 언문 또한 편민을 위한 것이 아니냐. 그대들이 설총만 옳게 여기고
    그대들의 군상이 한 일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또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을 알며 자모는 얼마나 있는지
    아느냐. 만일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 또
    상소에 이르기를 "신기한 재주"라고 했으니 내가 늙마에 소일하기가
    어려워서 책을 벗삼고 있을뿐이지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해서
    했단 말이냐"

    이 상소 말미에는 당뇨병과 풍증 안질로 건강이 나빠져 청주 초수리
    냉천으로 가는 세종이 정음관련자료를 많이 가져가려는 것을 공박하는
    내용이 적혀있어 정음을 공표한 뒤에도 연구에 몰두해 있던 세종의 모습을
    되짚어 볼수있게 해준다.

    이미 통설이 돼버린 협찬설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정호박사(전
    충남대총장)가 반박한바 있다. 또 최근에는 이기문교수(서울대)가
    "훈민정음 친제론"이란 논문을 발표,세종이 음운론과 문법을 넓고 깊이
    연구한 학자였다는 것을 밝히고 당시 훈민정음을 창제할 능력이 있었던
    학자는 세종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 친제설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해
    놓았다.

    9일은 5백47돌 한글날이다. 한글을 세종혼자서 만들었든 신하와 같이
    만들었든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유에 따라
    역사적사실도 이리변했다 저리변했다하고 정권에 따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도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이 요즘의 세태다. 진실은 오직 하나뿐인데도
    말이다.

    우리 역사상의 인물중 이런면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라는 생각이든다. 이 두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돼가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퍽 흥미있는 일이 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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