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자동차(주)는 돈도 벌고 발언권도 대단하였다.
이규동과장(당시직급)은 "신진에서 가져온 자동차부품수입신청서 중에는
국산가능품도 많이 들어있었으나 이것을 삭제하려 들면 야단이 났다.
장관실에 막바로 압력이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김장관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실무자가 알아서 잘 할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과장의 입장은 난처해 지기만 했다. 신진에서는
회장까지 와서 서류를 재촉했고 심한경우 서류결재가 날때까지 자리를
떠나지를 않았다. 신진의 사장과 회장은 장관실에 막바로 들어가서 재촉도
했다. 김창원사장은 다혈질이라 곱지 않은 언사도 썼다고 한다. 한번은
청와대비서실장실에서 있었던 회의중 김사장이 상공장관을 보고 "자동차의
자자도 모르면서."라는 말까지 했다. 동석했던 박충훈부총리가 보다못해
"김사장!말을 삼가하시오. 일국의 장관에게 그런 말투가 어디있소.
장관한테 사과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신진(주)은 상공부로서는
골칫거리였던 시절이다.

김창원사장과 필자는 시발자동차때부터 안면이 있을 정도로 오래 알고
지냈다. 김사장이 신진자동차를 내놓고 난후 내 방에 찾아왔다. 당시
김사장은 몸이 좀 불편해 보였다. 건강에 조심하라고 이야기하며
"대인관계를 좀 부드럽게 하시오"하니 김사장은 "자기도 자기 성격을 잘
알고 있는데 성격을 못 고치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성격 때문에 신진도
내놓게 되었다고 후회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은 말레이시아에서
양어사업을 엄청나게 크게 벌이고 있다니 축하할 따름이다. 결과론이지만
신진에서 국산화를 앞당겨 나갔다면 신진도 살아남았을 것이고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같이 느껴진다.

이래서 자동차국산화는 민간업자에게만 맡겨놓을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참고로 69년 당시 상공부 보고자료를 본다.

당시는 SKD방식,즉 자동차부품을 뭉치째로 들여오는 것이 아니고
CKD방식이라고 해서 완전 분해해서 수입할 때이다. 차체도 분해해서
들어오니 용접도 해야하고 도장도 해야할 때이다.

>>> 부품소재비가 70% <<<

자동차 원가 구성비를 보면 부품소재비가 70%,자동차조립비가 9%,간접비및
이윤21%로 되어있다. 즉 조립비는 9%에 지나지않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자동차조립만 가지고는 공업육성에 별로 도움을 못준다. 일방 이들 부품을
수입하는데 막대한 외자가 소요되었고 이 금액은 매년 급속히 늘어가고
있었다. 66년에 3백29만달러였던것이 67년에는 3배로 늘어난
9백13만달러,68년에는 2천2백98만달러,69년에는 4천2백58만달러가 됐다.
불과 3년사이에 13배나 늘어났다. 외자가 부족할때라 이만한 달러를
소비한다는 것은 국가경제에 큰 문제였다. 순 외자를 4천2백58만달러
쓴다는것은 몇억달러를 수출해야 겨우 떨어지는 외화 가득액인 것이다.

>>> 국내업체 타격심해 <<<

자동차 수입부품이 늘어나고 있는것처럼 국내 부품생산이 같은 비율로
늘어나고 있었다면 큰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국내부품업체들은
수입부품으로 입는 타격이 날이갈수록 심해져갔다.

한예로 피스톤의 경우 66년에 12만개 생산하던것이 3년후인 69년에는
겨우 14만4천5백개로 늘어났고 피스톤링은 66년이나 69년이나 30만개로
똑같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하면 신진자동차(주)에서 이들 국산품은 아예
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9년 신진에서 생산된 코로나의 예를
들어보자.

상공부에 보고된 국산화 실적은 38.2%로 그 내용은 엔진부분에
5.75%,섀시부분에 8.34%,차체부분에 19.95%,전장품 기타에 4.15%로
되어있다.
나머지 61.81%는 수입한 것이다. 국산화된 부분도 기계제품다운 것은
거의 없고 파이프 호스라든가,타이어 스프링 유리 의자 라디오
램프등이었다. 상공부에서 볼때 신진자동차로 하여금 자동차국산화율을
향상시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게됐다.

신진자동차는 국가이익을 도외시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업체였던
것이다. 상공부의 자동차공업 일원화방침은 당초의 목적이 국내수요가
적으니 당분간 자동차 조립공장을 독점시키는 것이었다.

수요를 한곳에 모아줌으로써 부품공업육성에 이바지하려고 했는데 그
결과는 자동차시장을 독점만 시켜주었지 국내 부품공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못했다.

>>> 독점결과만 초래 <<<

독점기에 대한 가장 나쁜 면만 노출된 것이다. 이렇게 될 바에는 오히려
국산화를 많이 하는 업체에 더많은 혜택이 가도록 경쟁시키는 쪽이
(국산화 내지는 자동차공업발전에)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이렇게되어 상공부가 추진해왔던 자동차공업육성책의 기본정책인
자동차공업 일원화방침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정부관료나 언론계의 잠재의식 속에는 자동차공업정책이라고
하면 으레 일원화방침을 떠올려 삼원화,사원화하는 새로운 용어까지
만들어 냈다. 또 자동차업체는 숫자가 적을수록,즉 사원화보다는
삼원화,삼원화보다는 이원화가 좋은 정책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의식은 자동차조립회사를 신설하는데 저해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까지의 줄거리가 자동차공업 일원화시대의 이야기로 우리나라
자동차공업 발전사의 제2막이 되는 셈이다.

이제부터는 자동차 국산화정책의 추진시대 즉 자동차 부품의 국산화에
노력하는 시기의 상황을 살펴본다.

68년10월 박정희대통령은 당시 김정류상공부장관으로부터 상공행정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자동차 국산화가 늦어지고 있는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국산화 비율을 높이기 위한 보다 엄격한 조건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상공부에서는 자동차 국산화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김장관은 백형배공업2국장과 이기동기계2과장을 불러 자동차 국산화대책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당시 기획관리실장인 필자에게도 협조하라고
했다. 이기동과장은 자동차 담당과장으로 세번째로 부임했다.

자동차 담당과장은 6개월이 멀다하고 바뀌었다. 어떤때는 과장이하
타이피스트까지 과직원이 몽땅 바뀌기도 했다. 소위 모략이 심한
부서로서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자리였다.

윤승식씨도 69년2월1일 기계2과의 사무관으로 부임해서 자동차공업을
담당하게 되었을때 한사코 반대했다. 이과장과 백국장이 설득을 하고
심지어 이우룡차관보까지 부탁해서 겨우 승락을 받았다.

이렇게 기피하는 자리가 자동차공업 담당이었다. 윤사무관은 그후 각종
압력 모략등 몰아치는 파도의 방파제 역할을 하게된다.

머리가 치밀하면 이론에 강하다. 일단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굽힐줄
모른다. 한마디로 강인한 행정가이다. 고생도 했고 모략도 많이 받았다.
자동차공업에 미쳤던 것이다.

사무관으로 71년7월4일까지 근무하다 과장으로 진급해서 계량국에
배속되었는데 4개월만에 다시 기계2과로 돌아와 과장자리를 맡아
74년8월9일까지 일했다. 너무나 시달리다 몸을 망쳐 병원에 입원,이
자리를 뜨게 되었다(입원기간이 길어 대기발령을 받았다. 공무원
사회에서는 대기발령이란 사고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해당되며 불명예스럽게
생각하기 쉽다. 윤승식씨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우리나라
자동차발전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때에 5년2개월간을 근무했으니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산 증인인 셈이다.

후에 동자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내고 광업진흥회 사장을 역임했다.
윤승식씨의 회고를 들어본다.

>>> 5개년으로 단축 <<<

윤사무관은 단시일내에 자동차의 완전 국산화를 이루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7개년계획을 수립해서 필자에게로 가지고 왔다. 필자는 "자동차
국산화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자동차 제작이란 별것이 아니다. 1"엔진주물공장"과 "엔진가공공장"을
만들어 엔진을 국산화하고 2"기어공장"을 만들어서 "미션"과 "차축"을
국산화하고 3"프레스공장"을 건설해서 차체를 만들면 된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공업이 발전했으니 이 정도의 공장은 건설하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별것이 아니다.

또 7개년 계획이라면 업자들은 이리 미루고 저리 미뤄서 국산화를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니 쇠뿔도 단숨에 빼야 한다. 5개년계획으로 해서 밀고
나가라". 이렇게 해서 권광원과장과 윤승식씨가 작성한 것이 "자동차및
주요부품 국산화계획"이다. <>국산화할 품목과 목표를 정하고 <>담당할
업체를 선정하며 <>이들 업체를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소위 필자가
자주 쓰는 "임팩트폴리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