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위해 내한했던 데이비드 로스(미국휘트니
미술관 관장)와 엘리자베스 서스맨(휘트니비엔날레 전시조직자)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둘러본 뒤 "훌륭한 전시공간"이라고 말했다. 전시장이
좋아 휘트니비엔날레 출품작들이 미국전때보다 돋보인다고도 얘기했다.

굳이 이들 외국인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공간
으로서 좋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의
건물이 좋다는 사람은 많아도 그곳에 전시된 작품이 좋다는 사람은 거의
없는듯 하다.

예술의전당 서울오페라극장은 동양최대이자 최초의 오페라전문극장이라고
한다. 서울오페라극장 건립에 투입된 금액은 약8백억원. 2백27평에 달하는
무대의 수직과 수평이동이 모두 가능하고 화재가 나면 30초안에 무대와
객석을 완전 밀폐식으로 차단하는 철제방화막이 설치되는 등 초현대식
공연장으로 만들어졌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문화예술공간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소극장과
화랑이 늘어난 것은 물론 정부 또는 산하기관이 주관하는 각종 문화예술
공간이 곳곳에 생겨났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예술의전당미술관과 서예관 음악당
국립국악당이 문을 열었고 서울올림픽조각공원이 조성됐다.

최근에는 각 구청에서 단순한 구민회관이 아닌 문화예술회관을 짓고 있다.
서대문구에서는 홍은동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에 공연장과 독서실 교양
강좌실을 갖춘 문화회관을 설립,지난 7월 문을 열었고 은평구에서는 녹번동
근린 공원내에 총공사비 1백25억원을 들여 지하2층 지상2층 규모의 문화
예술회관을 지을 예정이다.

문화예술 공간을 장만하는 측의 변은 한결같다. 국민내지 시민 혹은 구민
들의 문화예술향수권을 증진시키고 그 결과 국민들의 정서함양에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이다.

문화예술행위가 이뤄지고 국민들이 그것을 감상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공간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천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만들어질 때 우리의 전통문화와 미술문화의 토양이 한결 비옥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음악당과 연극무대 무용공연장이 늘어나면 국민전체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될 것도 틀림없다.

그러나 문화예술행위란 장소만 생긴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땅이
아무리 넓어도 심고 가꾸지 않은 곡식이 나는 법은 없다.

문화예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간만
있다고 문화예술이 발전하거나 그 질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수기회 증대라는 대목 역시 마찬가지. 좋은 전시회와 멋진
공연을 기획하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주면 관람객은
증가하게 마련이다.

구체적인 문화예술행위를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라는 이른바 문화예술의
소프트웨어를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장소,즉 하드웨어만을 늘리는 것은
문화예술 발전이나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수권 증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없이 훌륭한 전시공간이라는 국립현대미술관의 93년예산은 43억원.
그러나 이중 소장품 구입예산은 8분의 1에 못미치는 5억원이다.

이에 비해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이래 단일전시회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고 자랑하는 93휘트니비엔날레서울전에 투입한 금액은 미화
65만달러. 우리돈으로 5억원이 넘는다. 이돈의 대부분은 기업의 협찬금으로
이뤄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학예연구원은 이 전시회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측이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아무것도 모르는 일부
평론가와 대다수 보도관계자들의 잘못된 보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관객동원이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노력중에 기업의 후원금 출연
교섭 대목이 있음도 물론이다.

"미국의 변두리미술"을 국내미술인과 애호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울인
그같은 노력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운영이나 자체전시회 기획을 위해
쏟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평소관객이나 소장품이 한결 많았을 것임은
다시 말할 여지가 없는듯 보인다.

개관 15년이 지난 세종문화회관의 관람객수가 전첵객석의 25%에 못미치고
있는 것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이 더없이 좋은 위치와 주차시설에도 불구하고
대관화랑으로서의 기능조차 변변히 못하고 있는 것등은 소프트웨어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하드웨어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당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1년중 이들 공연장을
단한번이라도 찾은 국민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대목에 이르면 연간
공연작품수가 20편을 넘기 어려운 국내 오페라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동양최초이자 최대의 오페라극장 개관은 낯선 나라의 일처럼 여겨진다.

하드웨어,즉 문화예술공간에 어울리는 적절한 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을
위한 철저한 사전계획과 운용방안,즉 문화예술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드웨어의 확충보다 엄청난 국고를 들여 세운 기존의 하드웨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증대에 힘쓸 때 문화예술의
진정한 발전과 국민들의 문화예술 향수권 증대가 함께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박성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