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91) 박성상 <전 한국은행 총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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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1월7일에 신임행원으로 취직한 조선은행은 일본인이 80%,조선사람이
20%이며 수위도 일본사람이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입행하여 박희행원(한은부총재.농업은행 총재역임)
권녕중행원(상호은행이사역임)등 조선사람 선배들의 지도와 도움을 받았다.
44년12월 일본군에 징병으로 입대할때까지 조선은행에서 약3년간 고객을
상대로하는 예금업무 현금출납 외환 대출,그리고 조사업무등을 고루고루
배우게 된것은 후일 중소기업은행 전무 행장 그리고 한은총재로서 현실감
있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데 큰 보탬이 됐다.
당시의 조선은행은 조선에서의 중앙은행 역할과 일반 상업은행업무를 같이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출생일이 10일만 빨랐으면 일본군에 나가지않아도 됐지만 출생일이
늦어 일본군입대를 피할길이 없었다.
입대하기 6개월전인 44년6월께 청진역장을 하고있는 6촌형님이 고향에
왔다가 우리집에도 인사차 들른적이 있었다. 그 형님은 "이제는 일본이
전쟁에 질것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만주의 관동군에 대한 지원물자
수송이 거의 두절되었다는 것이었다. 관동군의 주력도 이동중 대부분이
미공군의 공습으로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일본이 전쟁에
진다는 소리를 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전쟁이 오래가지 못한다면 군대에서 훈련기간을 오래끌어 전사를
면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울근교 수색의 특별공병
28연대(현 국방대학원 자리)에 입대하고 간부후보생에 지원했고 8개월만에
해방을 맞아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구할수 있었다.
간부후보생으로 장교가 되면 최소한 6년은 근무해야 하고 소위로 임관하면
전투에서 적의 표적이 되는 소모품이돼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국사람은
일본군이 권하더라도 지원하지 말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훈련기간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속셈으로 지원하여 하사관이
아니고 장교시험에 합격했었다.
그 계획은 적중했다. 45년5월부터 군이동이 시작되어 같이 입대한 일본
군인과 조선사람 군인의 3분의2가 동남아 수송선에 탔다가 수송선 침몰로
모두 전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8월11일에는 텅빈 군막사에 서울에서 징집한 40세이상의 일본군인들이
입대했다. 47세가량으로 보이는 이등병 계급장을 단 신병에게 물어보았더니
직업은 이발사인데 서울에서 갑작스럽게 징집되었다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내가 만약 간부후보생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태평양 해상에서
침몰된 수송선과 같이 수장을 당했거나 두만강 전투에서 나와 함께
훈련받던 전우들과 같이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어 타쉬켄트에 끌려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군은 8월15일 전부대원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을 듣도록 했다. 이틀후 군보급 물자 수송임무를 받고 서울거리로
나왔다가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에서 해방을 환호하는 소리를
듣고는 더이상 일본군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8월19일 저녁에 임시계급 병장이라는 특전을 이용,불침번 인계후 화장실
가는길에 뒷산으로 도주했다. 그날밤 한 민가에 들어가 잠을 자는 주인을
깨워 대검과 군화를 벗어주고 고무신과 바지저고리를 얻어입고 서울
작은삼촌댁에 와서 숨었다.
그러나 군에서 북아현동 큰삼촌댁에 수색대를 보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고로 기차를 타고 영천에 있는 외가에 갔다. 거기서 어머님과 2개월을
지내고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복직했다.
나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미리미리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20%이며 수위도 일본사람이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입행하여 박희행원(한은부총재.농업은행 총재역임)
권녕중행원(상호은행이사역임)등 조선사람 선배들의 지도와 도움을 받았다.
44년12월 일본군에 징병으로 입대할때까지 조선은행에서 약3년간 고객을
상대로하는 예금업무 현금출납 외환 대출,그리고 조사업무등을 고루고루
배우게 된것은 후일 중소기업은행 전무 행장 그리고 한은총재로서 현실감
있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데 큰 보탬이 됐다.
당시의 조선은행은 조선에서의 중앙은행 역할과 일반 상업은행업무를 같이
취급하고 있었다.
나는 출생일이 10일만 빨랐으면 일본군에 나가지않아도 됐지만 출생일이
늦어 일본군입대를 피할길이 없었다.
입대하기 6개월전인 44년6월께 청진역장을 하고있는 6촌형님이 고향에
왔다가 우리집에도 인사차 들른적이 있었다. 그 형님은 "이제는 일본이
전쟁에 질것같다"고 했다. 왜냐하면 만주의 관동군에 대한 지원물자
수송이 거의 두절되었다는 것이었다. 관동군의 주력도 이동중 대부분이
미공군의 공습으로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일본이 전쟁에
진다는 소리를 하는 이가 없었다.
나는 전쟁이 오래가지 못한다면 군대에서 훈련기간을 오래끌어 전사를
면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서울근교 수색의 특별공병
28연대(현 국방대학원 자리)에 입대하고 간부후보생에 지원했고 8개월만에
해방을 맞아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구할수 있었다.
간부후보생으로 장교가 되면 최소한 6년은 근무해야 하고 소위로 임관하면
전투에서 적의 표적이 되는 소모품이돼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국사람은
일본군이 권하더라도 지원하지 말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훈련기간을 연장시켜보겠다는 속셈으로 지원하여 하사관이
아니고 장교시험에 합격했었다.
그 계획은 적중했다. 45년5월부터 군이동이 시작되어 같이 입대한 일본
군인과 조선사람 군인의 3분의2가 동남아 수송선에 탔다가 수송선 침몰로
모두 전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8월11일에는 텅빈 군막사에 서울에서 징집한 40세이상의 일본군인들이
입대했다. 47세가량으로 보이는 이등병 계급장을 단 신병에게 물어보았더니
직업은 이발사인데 서울에서 갑작스럽게 징집되었다며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내가 만약 간부후보생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태평양 해상에서
침몰된 수송선과 같이 수장을 당했거나 두만강 전투에서 나와 함께
훈련받던 전우들과 같이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어 타쉬켄트에 끌려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군은 8월15일 전부대원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일본천황의
항복방송을 듣도록 했다. 이틀후 군보급 물자 수송임무를 받고 서울거리로
나왔다가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에서 해방을 환호하는 소리를
듣고는 더이상 일본군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8월19일 저녁에 임시계급 병장이라는 특전을 이용,불침번 인계후 화장실
가는길에 뒷산으로 도주했다. 그날밤 한 민가에 들어가 잠을 자는 주인을
깨워 대검과 군화를 벗어주고 고무신과 바지저고리를 얻어입고 서울
작은삼촌댁에 와서 숨었다.
그러나 군에서 북아현동 큰삼촌댁에 수색대를 보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고로 기차를 타고 영천에 있는 외가에 갔다. 거기서 어머님과 2개월을
지내고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복직했다.
나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미리미리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