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는 단연 L변호사이다. 꼭 12년전,스물
다섯살 난 필자와 같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을때 그분의 연세는 이미 50에
다가 있었다.

특히 그분은 17번 낙방한 끝에 18번만에 합격하였기에 흔히 말하는
칠전팔기가 아닌 17전18기의 주인공으로서 숱한 화제를 뿌렸었다. 그후
L변호사는 시험공부기간 동안의 끈기를 변호사로서도 유감없이 발휘하여
협회의 여러가지 일에 열심이었고 동기회 리더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L변호사가 몇해 전부터 골프를 시작하였다. 그 잘하던 술도 그만둔
채 골프에 열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골프를 한 이후 이제는 변호사들의
각종 골프모임에 총무간사로서 동분서주한다. 어쩌다 법정에서 만나면 곧잘
골프를 가르쳐 달라고 조른다. "지난번에는 소변호사처럼 허리를 돌리다가
큰일 날뻔 했다"며 껄껄 웃기도 했다.

"아내는 내가 이 세상에서 골프를 제일 잘 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소변호사는 앞으로 우리집에 놀러 오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내
골프의 실체를 알고 나면 아내가 얼마나 실망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지난 토요일에는 빗속에서 그 분과 함께 라운드를 했다. 코스를 도는
L변호사를 보고 있노라니 TV를 통해 보았던 치치 로드리게스와 라운드하는
것 같았다. 우선 움직임마다 여유가 넘쳐 흘렀다. 갤러리를 끝없이 즐겁게
해주는 치치와 마찬가지로 그 분은 끊임없는 유머와 농담으로 동반자와
캐디를 즐겁게 해주었다.

다만 한가지 다른 것은 치치가 볼을 부담없이 가볍게 치는데 비하여
L변호사는 스윙에 아주 신중했고 특히 티샷할 때에는 지나친 긴장으로
뒤땅을 치는 실수까지 보였다.

그러고도 티잉그라운드를 벗어나면 농담으로 배꼽을 잡도록 웃기는 것
이었다.

마침내 18홀 티잉그라운드에 오르면서는 "다시 태어나면 고시공부 보다
먼저 골프공부를 해서 나도 소변호사처럼 골프귀신이 돼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분 모습을 보며 나는 드넓고 푸른 골프장에서 골퍼들은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할것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여유"였다. 첫홀에서 OB를 냈다고
하여 골프채 챙겨들고 돌아서는 골퍼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골퍼들은 나머지 17개홀에서 만회의 기회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골퍼라면 누구나 전반의 좋은 스코어가 후반 나인에서 몰락하는 것을
보고 18홀 그린 뒤에서 "역시 골프장에 내 핸디캡이 있구나"하고 자신의
실력을 되돌아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골프장에서 버디를 보는 것보다는 보기를 만나기가 훨씬 쉽고 파3홀에서
트리플보기 하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그같은 골프는 바로 우리모두의
골프이고 "골프의 실체"중 하나이다.

"우리의 골프"를 즐기고 "골프가 그런것이다"라며 골프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L변호사와 같은 "여유"가 필요하다. 골프장에서 배울것은 바로
"넉넉한 여유"가 아닐까.

골퍼가 행운아라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여유"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