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은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저축을 늘려야 투자가 많이
된다느니 하는 막연한 매크로경제이론이나 경제성장률등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과 같이 필요한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
건설리스트가 더 손에 잡히는 경제계획 이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의 공장건설계획에 대한 집념은 그 추진속도에서도 능히 가늠할수
있었다. 계획시안에 담긴 5가지 주요 기간사업인 전력 시멘트 비료 정유 및
석유화학,그리고 제철공장건설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있던 박대통령은
우선 전력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하기위해 7월1일자로 전력3사를 통합,한국
전력공사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내가 상공부에서 자료를 입수해 공장건설계획 제1호로 기재한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정부보유외화(KFX)2천만달러를 할당했다.이에따라
20만kw 의 발전소를 계획보다 앞당겨 64년3월말에 준공했다. 이에따라 4월
1일부터 전기는 무제한 송전하고 전열기 사용금지를 해제했다.

현재 전력사용량이 20억kwh 에 달하는데 당시 39만kwh 로 무제한 송전을
자랑했으니 격세지감마저 있다.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했던 기업인들도 7월14일 석방하여 민간이 추진해야
할 공장건설을 맡겼던 것이다. 그후 기업인들은 경제학자들에게 발표된
공장건설 계획에서 어떤 사업을 맡을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경쟁적으로
부탁하는 등 공장건설프로젝트를 따기위한 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은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기전인 61년11월2일 이병철씨를 단장
으로 투자유치와 차관교섭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11월8일에는 이정림씨를
단장으로 유럽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들이 갖고간 투자유치 계획과 차관
교섭에 담긴 내용을 미국 사람들은 "쇼핑리스트(shopping list)"라고 혹평
했으나 이 쇼핑리스트는 그후 공장쇼핑을 추진할 수 있는 경제발전 기본
전략의 무기가 되었다.

미국사람들은 이 쇼핑리스트를 보고 우선 공장건설에 필요한 전기 수도가
갖추어진 공장설립 장소도 없이 무턱대고 공장을 지어달라고 한다며
비꼬았다. 또 차관을 받을 민간기업의 재무구조가 취약해서 외화를 빌려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부랴부랴 62년2월3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을 갖고 직접
첫삽질을 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공업단지가 있다는것을 해외에 알리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전기 정유 제철이외는 모두 민간기업이 계획된 공장건설 사업
을 추진해야 했지만 그 당시의 국내 유수기업들이라고 해야 국제기준에서는
중소기업에 지나지않아 공장수입에 필요한 차관을 단독으로 들여올 수
없었다.

그래서 62년6월12일 정부는 민간기업인의 공장건설용 차관도입에 정부가
보증을 설수 있도록하는 "차관지불보증에 관한 법률"과 "장기결제 방식에
의한 자본도입 특별조치법"을 의결,법제화해 민간기업의 외자도입을
도왔다.

5개년계획에 포함된 공장건설업자로 선정되면 우선 공장시설 전부를 장기
연불로 정부보증아래 수입할수있었다. 또 공장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도로
전기 수도등 제반시설을 정부가 제공해주었고 공장건설에 필요한 자금도
산업은행에서 장기시설자금으로 융자해주었다. 이뿐 아니었다. 공장운영
자금은 시중은행이 공장을 담보로 융자해 줌으로써 계획사업자로 선정만
되면 나머지는 속된말로 "땅집고 헤엄치기"였다. 그래서 너도나도 계획
사업자가 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유능한 기업가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을 하고있다.

과연 그럴까. 나는 59년 미국 국무부의 후진국원조기구인 AID보고서에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들"이라고 평한것을 본 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