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쑥 잡아뽑아서 냅다 요시노부의 목을 날려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다쿠라는 왼손으로 대검의 칼집을
불끈 거머쥐고 있을 뿐,오른손을 갈자루에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마치
그대로 굳어져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질 않고 요시노부를 노려보기만 했다.

요시노부가 마구 반말로 막말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취한
반사적인 자세라고 할수 있었다.

두세 걸음 비실비실 뒤로 물러선 요시노부도 바짝 긴장이 되어 핏기가
새하얗게 가신 얼굴로 이다쿠라를 마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숨막히는 듯한 긴장이 흐른 다음 요시노부가 푹 바람이 빠지는 듯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다쿠라공, 내가 말을 너무 함부로 했구려. 본의가 아니었소". "감기에다
몸살 기운 때문에 신경이 피로해져서 그랬나보오. 이다쿠라공,내 말을 들어
보오. 내가 에도로 가려는 것은 그곳이 우리의 본거지기 때문이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승산이 서질 않으니,우리의 본거지로 가서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어 볼까 하는 것이오. 동북 쪽의 많은 번들은 아직도 우리
막부를 지지하고 있소. 그들을 모조리 움직이면 전력이 크게 보강될게
아니겠소. 그래서 기어이 사쓰마의 망나니들과 조정의 간신들을 일소해
버리고 말 작정이오. 이다쿠라공의 말처럼 내가 결코 꽁무니를 빼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믿어주오" 어느덧 칼자루를 불끈 쥐고있던 이다쿠라의
손이 슬그머니 풀려 있었다.

"아,그렇습니까. 각하. 소생이 각하의 그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손한
언사를 함부로 입밖에 내어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용서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다쿠라는 덥석 그만 그자리에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됐소.일어나오. 미안한 것은 오히려 나 쪽이오". "어서 일어나라니까요"
"예" 이다쿠라는 정말 죄송스럽다는 그런 태도로 부스스 도로 일어섰다.

"자,그만 내려가도록 하자구요" "예,예" 불타는 후시에 쪽 먼 밤하늘을
뒤로하고 앞장서 천수각에서 내려가는 요시노부는 계단 중간에서 가벼운
현기증이라도 이는 듯 약간 비틀거렸다.

"아,각하,조심하세요" 뒤따르던 이다쿠라가 재빨리 다가가 부축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