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그날밤 이다쿠라에게 에도로 갈 생각을 밝히기는 했으나, 요시노부
는 그후 이틀 동안은 일절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질 않았다. 자기
에게 고분고분하던 이다쿠라가 그처럼 반발을 하는 걸 보니 섣불리 그런
의사를 밝혔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다쿠라의 말처럼 선봉대가 첫 교전에서 설령 밀렸다 하더라도 후속부대가
전세를 만회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며칠 기다려 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전세는 불리하게만 되어 갔다. 본영이 불타
버린 후시미 쪽은 물론이고, 도바가도 쪽도 패전을 거듭하여 후퇴에 후퇴를
계속하기만 했다. 패잔병들이 연일 오사카로 밀려들어왔다.

오사카성은 패잔병들로 넘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패잔병들이
싸움에 져서 후퇴해 올때와는 달리 한데 모이게 되어 그런지 전의가 되살아
나는듯 성안은 비장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악들이 복받치는
것이었다.

오사카성은 일본에서 둘째 가라면 섭섭할 정도로 거대하고 견고한 성으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넋이 깃들여있기도 한 요새였다. 이 성에서 끝까지
싸워 배은망덕한 무리들을 무찔러서 도쿠가와 막부 삼백년의 은혜에 보답
해야겠다고 패잔병들은 시퍼렇게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요시노분들 느끼지 못할 턱이 없었다. 부하 군졸들의
충성심에 약간은 가슴이 찡해진 그는 에도로 가려는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서양 세력의 도움을 받아서 전세를 역전시켜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시 프랑스 공사 레온 롯슈에게 사람을 보내어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오사카성으로 좀 와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롯슈 공사는 바쁜 용무가 있다는
핑계로 오질 않았다.

요시노부는 도리없이 이다쿠라를 사자로 롯슈에게 보냈다. 생각 같아서는
자기가 직접 찾아가 하소연을 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명색이 쇼군이라는
체통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이다쿠라를 대신 보냈던 것이다. 친필의
서찰을 휴대시켜서였다.

이다쿠라를 맞은 롯슈는 웃는 얼굴이었다. 조금도 못마땅해 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모로나 용무가 바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쇼군께서는 안녕하신지요?" 응접실에 마주앉아 커피를 권하면서 롯슈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두 눈에는 엷은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