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가 술상을 날라오자,덴쇼인은 자기가 손수 주호(주호)를 들었다.

"자,내가 한잔 따를테니." "아닙니다,대모님. 제가 먼저 따라드려야지요"
"아니라니까,쇼군이 되시고는 처음이니까 내가 늦었지만 축하하는 의미에서
먼저 한잔 따라야지요" "축하는 무슨. 쇼군이고 뭐고 엉망진창입니다"
요시노부는 몹시 수치스럽고 곤혹스러운 그런 표정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잔에 술이 차자, 이번에는 요시노부가 술병을 들고 덴쇼인의 잔에 가득
따랐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요시노부는 조슈정벌때 출정을 하여 오사카성에서 십사대 쇼군 이에모치가
병으로 죽자,뒤를 이어 그곳에서 쇼군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에도성에는
쇼군이 된 뒤 이번에 일년 이개월만에 처음으로 온 것이었다. 쇼군 보좌역
으로 에도성에 근무할때는 덴쇼인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으나, 쇼군이
되어 의조모와 의손자 사이가 된 후로는 처음 대면이었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자,요시노부는 찾아온 용건을 슬그머니 꺼냈다.

"대모님,오사카쪽의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들었지요. 패전을
했다면서요?" "예" "이기지 못할 싸움을 왜 시작했소?" "글쎄 말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전쟁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제가 뭣 때문에 대정봉환을 선언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덴쇼인은 말
대신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눈언저리의 하얀 살결에 술기운이
연한 분홍빛으로 살짝 어리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 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일본을 건설해 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만 조정에서 고약한 정변이 일어나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 뭡니까." 요시노부는 왕정복고의 정변과 그뒤 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사정을 자세히 늘어놓았다. 어디까지나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고,모든 책임이 유신정부쪽과 일부 과격한 부하들에게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덴쇼인은 처음에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더니,나중에는 슬그머니 표정이
굳어들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요시노부의 말하는 투가 너무
자기 발뺌만 하는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