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은 강물과 같다. 한번 흘러 가버린 세월은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다. 같은 빛깔의 물이라고 해서 똑같은 물이 아니듯이 세월의
흐름속에 명멸하는 사상 또한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어떤 사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어느 사이엔가 스쳐 지나가 버리고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새로이 등장한 것도 곧 스쳐가버린다. 인간이 정복할수 없는게
세월이다. 짧은 인생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무상의 표상이 세월이라는
얘기다.

세월의 거센 흐름속에 어느덧 또 한해의 종착점에 서있게 되었다.
1993년의 마지막날,지난 한해의 번잡한 세사들이 얽히고 설켜 아쉬움과
서글픔이 가슴에 다가옴을 떨쳐버릴수 없다. 섣날 그믐날의 옛 세시풍속인
제석행사라도 벌이면서 묵은 떼를 말끔히 씻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후련해질 수 있는 것일까.

옛날 조상들은 그믐날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길거리에 등불을 매달고
인가의 다락 마루 방 부엌 외양간 변소등에 등잔을 켜 놓아 어둠을 훤히
밝혔는가하면 사람들은 화롯가에 둘러 앉아 자지 않고 밤을 지새웠다.
한해의 마지막 밤이 가져다 주는 암흑을 광명의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이웃과 집안에 행운이 찾아 들기를 비는 습속이다.

지난 한해를 되돌아 보건대 밝음과 어둠이 교차된 세월이었다. 빛의
도래를 알리는 닭의 해에 걸맞게 새 정부가 출범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기대에 부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개혁과 사정의 회오리속에서
드러난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치부들이 우리의 마음에 지워질수 없는
상처를 남겨 주었다. 또한 땅과 하늘과 바다에서는 잇달아 대형사고들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버렸는가 하면 우루과이라운드 파고로 농촌이
기로에 서게 되는 충격도 겪었다.

어둠이 밝음을 잉태하는 우주의 질서처럼 지난 한해의 상혼들을 분연히
딛고 일어설때 새해의 밝음이 약속되리라는 점을 다짐하면서 김영랑의 시
"제야"를 읊어 본다.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못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어두운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가라 앉았다/제운 밤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희부연 종이등불 수줍은 걸음걸이/샘물
정이 떠 붓는 안스러운 마음결/한해라 기리운 정을 묻고 쌓아 흰
그릇에/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