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8년 여름,14살짜리 미국소년 마이클 케이는 난생 처음 일본을
여행하는 기회를 가졌다. 홍콩에서 무역업을 하는 삼촌집에 놀러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 여행에서 케이소년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약 1주일간의 일본여행후 일본을 배워 일본에서 성공해보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지난 85년,케이는 일본세콤사의 미현지법인인
세코메리카의 사장이 됐다. 세콤은 세계적인 경비용역업체.

그당시 매출액이라고 해봐야 수백만달러에 지나지 않았던 세코메리카를
케이사장(39)은 오늘날 매출액이 2억달러가 넘는 중견기업으로 육성시켰다.

"두드려라,그러면 열리리라".

그에게 이것처럼 잘 어울리는 말은 없다. 일본문을 열심히 두드렸고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케이사장의 일본노크역사는 20여년전인 지난 71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에 스탠퍼드대신입생이 된 다음 여름방학때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갔다. 약 한달간 도쿄에서 교환학생시절을 보내면서 일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일본에서 성공하겠다는 어릴적 꿈을 이때부터
구체적으로 가꾸어나갔다.

그이듬해에는 아예 대학을 휴학하고 1년간 일본에서 일본말과 문화 정치
경제를 공부했다. 이때문에 스탠퍼드대에 입학한지 6년만인 76년에야
졸업할수 있었다.

하버드법과대학원에 입학한 77년부터 졸업하던 80년까지 일본에서
사업지식을 더욱 쌓아나갔다. 이기간동안 여름방학때마다 도쿄로 건너가
일본의 한 유명한 법률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대학원을 졸업한뒤에는 로스앤젤레스의 깁슨,던 & 크러처법률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는 2년간의 깁슨,던 & 크러처사생활을 집어치우고 82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단 도쿄대에 학생신분으로 적을 두고는 부업으로 몇몇 일본업체들을
위해 법률자문을 해주었다.

케이가 법률자문을 해주던 일본기업중 하나가 세콤이었다.

그는 회사일로 이다 마코토 세콤회장과 수시로 만나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
나갔다.

케이의 현란한 일본어구사력과 풍부한 법률및 경제지식은 이다회장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을 알고 이해하려는
케이의 성실함은 이다회장으로 하여금 케이를 아주 쓸만한 외국인친구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함께 술도 마시고 낚시여행도 하는 동안 케이와 이다회장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날 케이가 지금의 세코메리카사장이라는 전문경영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하는 운명의 시간이 찾아왔다.

85년 여름,도쿄근처의 한 강가에서 함께 낚시바늘을 드리우고 있을때
케이는 이다회장으로부터 갓 설립된 세코메리카를 한번 맡아 운영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14살 소년시절부터 품어온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케이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세코메리카의 최고경영자로 금의환양했다.

케이사장은 먼저 사업확장을 경영목표로 두었다. 설립된지 얼마되지않은
회사였기에 우선은 사업을 늘려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장이 된 이듬해 앰뷸런스서비스업체인 라이프플리트를 사들였다.

또 1년뒤인 87년에는 한 가정건강관리업체를 인수했고 89년에는
24시간동안 어린이를 돌보아주는 캐어비전캥거루키드사를 매입했다.

새로운 영역으로 사업을 늘려가는 한편 주력사업인 기업들에 대한
보안서비스업도 확장해나갔다.

이같은 사업확장덕분에 지난해 회사매출액은 2억2천5백만달러를 기록했다.
사장이 된 첫해인 지난 85년에 비해 50배이상 늘어난 매출액이다.

회사규모면에서는 어느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고 있는 케이사장은
올해의 경영목표를 기업내실화에 맞추고 있다. 시장확대가 한계에 이른
어린이보호사업은 그만둘 생각이고 업체간의 가격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정건강관리사업도 규모를 축소해나갈 방침이다.

케이사장,그는 어릴때 일찌감치 인생목표를 세워놓고 꾸준히 그문을
두드린끝에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기업인중 하나이다.

<이정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