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키고,요시노부를 비롯한 주전파 중신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건으로 에도 막부를 유신정부측에 넘겨주는 그런 화의가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 두가지 조건이 틀림없이 받아들여질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조건부 항복이었다.

사이고는 즉시 옆방에 대기하고있는 막료인 무라다신하치와 나카무라한지로
를 불러서 가쓰가 있는 앞에서 내일의 에도성 공격을 보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사이고 도노,빈틈이 없으시군요" 두 사람이 물러가자,가쓰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빈틈이 없다니,무슨 뜻입니까?" "중지가 아니라,보류니 말입니다" "아직
완전히 중지할 단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앞으로 일이 되어가는 걸
봐야지요. 허허허." "그러니까 빈틈이 없으시다는거 아닙니까" "자,가쓰
도노. 합의가 잘 됐으니 한잔 축배를 들어야지요. 일어나세요. 저쪽
방으로 갑시다" 자리를 옮겨서 사이고는 이른 점심을 겸한 주연을
베풀었다. 그자리에서 두사람은 이제 일체 현재의 상황과 관계되는 그런
얘기는 입밖에 내질 않고 그저 오래간만에 만난 지기끼리의 과거담을
한가롭게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승자와 패자의 관계가 아니라,다만
옛지기의 사이일 뿐이었다. 두사람 다 대인의 풍모가 역력하였다.

술기운이 좀 오르자,사이고가 바깥 정원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봄 기운이 이제 완연하죠?" "예,에도에 봄이 오고 있어요" 함축적인
가쓰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사이고도, "에도뿐 아니라,일본 전토에 곧
봄이 무르익을 거예요"하고 기분좋게 잔을 기울였다.
낮술에 혼혼하게 취한 가쓰가 말을 타고 건들건들 마부와 함께 에도성으로
돌아갈 때였다. 중도에 아카하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는 중간 부분이
둥그스름하게 위로 솟은 반월형이었다. 다리의 건너편 골목 어귀에 웬
수상한 사내가 하나 다리쪽을 지켜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는군. 허허허. 그래서 내가 오늘은 일부러 이렇게
평복 차림을 한 거라구" 마상에서 가쓰는 공연히 기분이 유쾌한듯 말고삐를
잡고 걷는 마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설마 총재 대감께서 이렇게 행차하실 줄은 꿈엔들 알겠습니까" 마부도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