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창] (6) 판소리 강정자씨..힘찬소리가 소년장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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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 6.25까지 5년여간. 그 혼란의 시기에도 서울 봉익동의 넓은 한옥집
에는 명인 명창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감나무 포도넝쿨 석류열매가 가득
하던 넓은 집의 한켠 사랑방에서 김연수 임방울 박초월씨등 당대의 명창들이
벌이던 한 바탕 소리의 향연은 예닐곱 어린 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적벽가"로 지난해 중요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후보로 지정된 명창
강정자씨(52.국립창극단단원)의 어린 시절은 당대소리꾼들에 관한 기억으로
가득차있다.
"박선생이 단종을 맡고 김선생이 성삼문,임선생이 유응부를 맡아 창극
"사육신"을 연습하던 광경이 생생합니다. 단종의 애절한 소리에 내용은
몰랐지만 절로 숙연해지더군요. 세조의 호령소리가 나면 문득 두려움을
느꼈지요" 강씨의 선친은 말하자면 국악후원자였다. 전국의 명인 명창을
초청해 숙식을 제공했고 지나가던 단체도 마다않고 받아들였다. 6.25당시
대구로 피난가서도 그의 후원은 끊이질 않았다.
어린 강씨가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로 재롱을 피우면 "재주있구나"라는
여러 선생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김연수선생이 특히 많이 칭찬해주셨지요. 전쟁 중 부친을 잃고 서울로
돌아온 57년부터 양아버지로 모시고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덕성여중고를
다니면서 저녁에는 김선생으로부터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등을 배웠다.
64년부터는 국악사양성소(국악고교전신)에서 중학교 과정에 출강하면서
박동진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배우기 시작했다. 74년 전수생,80년
이수생, 82년 전수조교를 거쳐 전수조교 11년만에 보유자후보가 됐다.
"60년대 중반 당시 박선생은 우리 판소리역사상 최초로 완창무대를
가지셨지요.
그야말로 전성기였고 그래서 무척 바쁘셨어요" 그사이 박선생과 함께
창극공연도 같이하고 국악원의 많은 공연에 듀엣으로도 활동했다.
박선생에게는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예수전"등을 고루 배웠지만
특히 "적벽가"를 중점적으로 배웠다. 76년 "적벽가"완창발표회를 가졌고
이듬해 "심청가"완창발표회를 가져 그녀의 이름이 국악계에 알려지기 시작
했다.
해외공연도 쉴새없이 다녔다. 73년 이란 프랑스 서독 스위스 이탈리아등
유럽순방공연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92년 중국 장춘대학에 초청받아 열흘간
다녀온 것까지 해마다 거르지않고 해외공연을 다녔다.
60~70년대 인기를 끌었던 국극단에서도 활약,"미륵왕자" "류충열전"에서
주연을 맡았고 창극 "심청전"에서는 곽씨부인역을 맡았다.
강씨는 여자로서는 드물게 힘이 넘치는 소리를 가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적벽가"는 감정표현이 풍부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냘프고
작은 몸매로 무대에 나서 첫소리를 내지르면 모두들 깜짝 놀란다고.
"적벽가"에는 특히 전투장면이 많은데 강씨는 여자로서의 한계를 장점으로
활용,발림(과.소리나 아니리의 여러가지 표현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 청중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에게서 소년장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적벽가"를 1천번은 더 불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 부분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배울 것이 아직 많지요" "소리는 40이 넘어야 조금 안다" "소리를 알자
죽는다"는 선배들의 말이 실감난다고. 강씨는 그러나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번 찾아가며 인재를 등용하고자 힘을 기울일 때 같이 힘이 솟고 조조를
풀어줄 것을 알면서도 관우를 보내는 제갈공명의 후덕에는 신명이 절로
난다"며 "적벽가"자랑을 잊지 않는다.
76,77년 완창공연을 하고 78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한창 이름이 오를때
강씨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79년 정월 화재를 당해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다. 화상정도가 약해 다행이었지만 그 충격이 커 지금도 소방차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온 몸에 힘이 빠진다고. 한동안 소리를 할수가 없었다.
"소리꾼이 소리공부를 하지않으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박동진선생의 말이 힘이 됐다. 지난해 10월30일에는 4시간 30분짜리
"적벽가"완창무대를 가져 그의 건재함을 국악계에 알렸다.
"다시 힘을 얻었지요. 평생을 소리만 하고 살겠다는 마음에 지난해 이제
까지 공부한 것을 모아 완창무대를 마련했고 그 준비도중 보유자후보로 지정
받았습니다. 그것은 복이지만 이제는 의무이기도 하지요" 소리인생을 사느라
결혼은 안했지만 그것을 이제 더 중요한 길로 가라는 하늘의 말씀으로 이해
하며 살고 있다고.
강씨는 89세의 노모와 함께 반포에서 조용한 설연휴를 보냈다.
<권녕설기자>
에는 명인 명창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감나무 포도넝쿨 석류열매가 가득
하던 넓은 집의 한켠 사랑방에서 김연수 임방울 박초월씨등 당대의 명창들이
벌이던 한 바탕 소리의 향연은 예닐곱 어린 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적벽가"로 지난해 중요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후보로 지정된 명창
강정자씨(52.국립창극단단원)의 어린 시절은 당대소리꾼들에 관한 기억으로
가득차있다.
"박선생이 단종을 맡고 김선생이 성삼문,임선생이 유응부를 맡아 창극
"사육신"을 연습하던 광경이 생생합니다. 단종의 애절한 소리에 내용은
몰랐지만 절로 숙연해지더군요. 세조의 호령소리가 나면 문득 두려움을
느꼈지요" 강씨의 선친은 말하자면 국악후원자였다. 전국의 명인 명창을
초청해 숙식을 제공했고 지나가던 단체도 마다않고 받아들였다. 6.25당시
대구로 피난가서도 그의 후원은 끊이질 않았다.
어린 강씨가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로 재롱을 피우면 "재주있구나"라는
여러 선생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김연수선생이 특히 많이 칭찬해주셨지요. 전쟁 중 부친을 잃고 서울로
돌아온 57년부터 양아버지로 모시고 판소리를 배웠습니다" 덕성여중고를
다니면서 저녁에는 김선생으로부터 "흥보가" "춘향가" "수궁가"등을 배웠다.
64년부터는 국악사양성소(국악고교전신)에서 중학교 과정에 출강하면서
박동진선생에게 판소리 다섯마당을 배우기 시작했다. 74년 전수생,80년
이수생, 82년 전수조교를 거쳐 전수조교 11년만에 보유자후보가 됐다.
"60년대 중반 당시 박선생은 우리 판소리역사상 최초로 완창무대를
가지셨지요.
그야말로 전성기였고 그래서 무척 바쁘셨어요" 그사이 박선생과 함께
창극공연도 같이하고 국악원의 많은 공연에 듀엣으로도 활동했다.
박선생에게는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예수전"등을 고루 배웠지만
특히 "적벽가"를 중점적으로 배웠다. 76년 "적벽가"완창발표회를 가졌고
이듬해 "심청가"완창발표회를 가져 그녀의 이름이 국악계에 알려지기 시작
했다.
해외공연도 쉴새없이 다녔다. 73년 이란 프랑스 서독 스위스 이탈리아등
유럽순방공연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92년 중국 장춘대학에 초청받아 열흘간
다녀온 것까지 해마다 거르지않고 해외공연을 다녔다.
60~70년대 인기를 끌었던 국극단에서도 활약,"미륵왕자" "류충열전"에서
주연을 맡았고 창극 "심청전"에서는 곽씨부인역을 맡았다.
강씨는 여자로서는 드물게 힘이 넘치는 소리를 가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적벽가"는 감정표현이 풍부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냘프고
작은 몸매로 무대에 나서 첫소리를 내지르면 모두들 깜짝 놀란다고.
"적벽가"에는 특히 전투장면이 많은데 강씨는 여자로서의 한계를 장점으로
활용,발림(과.소리나 아니리의 여러가지 표현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 청중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에게서 소년장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적벽가"를 1천번은 더 불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 부분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배울 것이 아직 많지요" "소리는 40이 넘어야 조금 안다" "소리를 알자
죽는다"는 선배들의 말이 실감난다고. 강씨는 그러나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번 찾아가며 인재를 등용하고자 힘을 기울일 때 같이 힘이 솟고 조조를
풀어줄 것을 알면서도 관우를 보내는 제갈공명의 후덕에는 신명이 절로
난다"며 "적벽가"자랑을 잊지 않는다.
76,77년 완창공연을 하고 78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한창 이름이 오를때
강씨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79년 정월 화재를 당해 간신히 몸만 빠져
나왔다. 화상정도가 약해 다행이었지만 그 충격이 커 지금도 소방차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온 몸에 힘이 빠진다고. 한동안 소리를 할수가 없었다.
"소리꾼이 소리공부를 하지않으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느냐"는
박동진선생의 말이 힘이 됐다. 지난해 10월30일에는 4시간 30분짜리
"적벽가"완창무대를 가져 그의 건재함을 국악계에 알렸다.
"다시 힘을 얻었지요. 평생을 소리만 하고 살겠다는 마음에 지난해 이제
까지 공부한 것을 모아 완창무대를 마련했고 그 준비도중 보유자후보로 지정
받았습니다. 그것은 복이지만 이제는 의무이기도 하지요" 소리인생을 사느라
결혼은 안했지만 그것을 이제 더 중요한 길로 가라는 하늘의 말씀으로 이해
하며 살고 있다고.
강씨는 89세의 노모와 함께 반포에서 조용한 설연휴를 보냈다.
<권녕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