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은행 여자농구팀 우승, 중소기업은행 남자농구팀 8강. 올해 열리
고있는 농구대잔치에서 은행팀들이 거둔 실적이다. 비록 선전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영화에 비해서는 말이 아니다. 은행들은 60년이후 20여
년 가까이 우리나라의 농구 축구 야구 등을 떠받쳐왔다. 이때의 주역
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필드는 떠났지만 ''야전사령관''으로서 현역시절
의 영화를 재현하고있는 사람들이 많다. 승패의 결과를 맛본 체험이
이들로 하여금 승리를 위해 내닫게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있다.

=================================================================

올해 열리고있는 농구대잔치에서 은행팀들이 거둔 실적이다.
비록 선전했다고는 하지만 과거의 영화에 비해서는 말이 아니다.
은행들은 60년이후 20여년가까이 우리나라의 농구 축구 야구 등을
떠받쳐왔다.
이때의 주역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필드는 떠났지만 "야전사령관"으로서 현역시절의 영화를 재현하고있는
사람들이 많다.

승패의 결과를 맛본 체험이 이들로 하여금 승리를 위해 내닫게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있다.
김재한주택은행월곡동출장소장(47).
그는 올해가 은행생활 꼭 23년째이다.
그러나 실제 영업을 전담한것은 이제 4년이 갓지난 "신출내기"이다.
나머지 19년은 은행원아닌 축구인으로 보냈다.
72년부터 79년까지 주택은행축구선수겸 국가대표역임.
80년부터 89년까지 주택은행축구부 코치및 감독.
이런 이력때문에 은행원보다는 축구인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70년대후반 1백90Cm가 넘는 큰 키를 이용, 상대방진영을 유린하던
모습이 웬만한 사람들의 머리속엔 생생하다.
이렇듯 반평생을 축구로 살아온 김소장이 축구와 "담"을 쌓은것은
지난 90년2월.
서울개포동지점차장으로 발령나면서부터였다.
2년6개월동안 코치(지점차장)로서 지도자수업을 쌓은 김소장은 지난
92년 대구신기동출장소장으로 부임, "야전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후 다시 1년만에 19명의 직원이 있고 어엿한 지배인등기도 돼있는
지점장급출장소장인 서울월곡동출장소장으로 옮겨왔다.
김소장은 자신이 은행원생활에 착착 적응해나가는 비결로 "지면
안된다"는 승부근성을 꼽는다.

선수와 감독시절 숱한 우승을 해본 승부사기질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 밑천으로 작용하고있다는 얘기다.
김영기 대한농구협회부회장은 농구계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역사로
통한다.

그의 공식 직함이 신보창업투자주식회사사장이라는걸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다.
김사장이 은행원옷을 입은 것은 지난60년.
당시 농업은행에 입행, 63년 중소기업은행으로 옮겨 보광동지점장까지
지냈다.

76년 신용보증기금창립때 총무부장으로 참여, 이사 감사 전무를 거쳐
지난 91년부터 자회사인 창투회사사장직을 맡고있다.
김사장이 선수로 활동하던 60년대초반은 한국남자농구가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시기.

때문에 그는 농구선수로서뿐만아니라 은행원으로서도 "일가"를 이룬
사람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밖에도 운동선수로서뿐만아니라 은행원으로서도 "성공"한 사람은
많다.

왕년의 농구국가대표센터출신인 백남정금융결제원상무와 연세대농구의
전성기를 이끌던 하의건 중소기업은행청량리지점장을 비롯 경동고야구
신화를 창출한 김영호한일은행자양동지점장과 김휘만한일은행고 강동
지점장 등 점포장급만 1백여명에 달한다.

행원급까지 합하면 운동선수출신이 은행당 2백여명이 훨씬 넘는다.
국민은행의 경우 점포장급 11명과 차.과장급 16명 대리급 45명 등
총1백88명이 운동선수출신이다.
이렇듯 운동선수출신들이 금융계에 대거 포진하고있는것은 금융단
운동부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60년대에 농구부와 야구부가 출범했으며 70년엔 축구부도 만들어
졌다. 마땅한 실업팀이 없던 당시로선 우수선수는 제발로 은행문을
찾아들었던것은 당연했던일.

그렇다고 이들에게 승진이나 보수에서 혜택이 주어졌던것은 아니다.
지난번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한 국민은행 여자농구팀은 주전5명이
2호봉승급, 비주전이 1호봉승급이라는 "보너스"를 받았을 뿐이다.

선수1인당 수백만원씩이 주어지는 프로나 실업팀하고는 격이 다르다.
대리로 승진하기위한 책임자자격고시도 마찬가지다.
일반행원의 경우 책임자자격고시에 합격하려면 5개과목의 평균점수가
60점을 넘어야한다.

운동선수는 3개과목이상을 50점이 넘어야 합격한것으로 간주해주는게
고작이다.
금융단운동부가 아직까지도 유인동기를 얻고있는것은 안정적인 직장
이라는 점.
비록 거액의 스카웃트비는 꿈도 꿀수없지만 은퇴후 평생직장으론
은행만한데도 없다.

한일은행에서 지금까지 야구선수를 지낸사람은 모두 2백여명.
이중 1백20명의 왕년의 스타들이 뱅커로 활약하고있다.
그만둔 사람의 대다수는 프로팀으로 갔으며 은행생활에 적응하지못해
자연도태된사람은 불과 30명안팎이다.
어떻게보면 철들고부터 계속 운동만해온 사람들이 은행에서도 두각을
나타낼수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운동선수들은 성격상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의리도 있고 신의도 각별하다.
더욱이 처절한 승부의 세계에서 승리자의 기쁨과 패배자의 설움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다.
이렇다보니 어느 영업점에가든 섭외력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고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운동선수출신으로 본점의 주요부장이나 임원이
된사람은 드물다.
그렇다고하더라도 "한번 이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은행영업에서도
이길줄안다"는 평범한 진실을 운동선수출신들이 증명해 보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