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가락에 배어있는 한의 정서를 많은 사람들은 이제 털어버리려한다.
삶과 함께한 음악에 어찌 슬픔만 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사물놀이의
경쾌함과 장구가락의 흥겨움이 국악에는 분명히 있다.

국악인들도 자신의 삶과 음악 주변에 맴돌고 있는 고난의 세월과 슬픈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은 희로애락
애오욕의 인간정서 중 어느것 하나로 단순화될수 없기 때문이다.

아쟁산조 명인 박종선씨(53.국립국악원민속연주단부악장)는 그러나 자신의
삶에 드리웠던 어두운 날의 기억을 잊으려 하지 않는다. 국악과 인연을
맺어 "욕심없는 예술인"의 길을 묵묵히 걷게 된것을 큰 불행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의 아쟁산조에 실려오는 정조는 그래서 항상 슬픔의 큰 테두리
속에 있다.

국악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열살이 되기전 국악으로인해 다시
외톨이가 돼버렸다.

그의 백부는 지금의 인간문화재급이면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당대 명창 박동실이다. 부친 박영실도 명고수 김동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 외조부 공창식은 전설적인 명창 임방울의 스승
이었다. 그 아들,그러니까 박씨의 외삼촌인 공기남 공기준도 유명한
소리꾼들이었다.

세살때 아버지 박영실씨가 창극"일목장군" 연습중 급사한후 어머니는
떠나고 그는 백부밑에서 자랐다.

백부와 외삼촌 공기남이 함께 월북하자 집안사람들은 국악을 끔찍히
싫어하게 됐다.

국악으로 집안이 망했는데 백부가 만든 "김유신보국가"를 흥얼거리는
천덕꾸러기는 밉보일 수 밖에 없었다. 열너덧살 무렵 그는 고향 광주를
떠났다.

전주 백도극장에서 공연중이던 화랑여성국극단을 찾아갔다. 백부의
양아들이었던 박후성씨(전국립창극단장)가 운영하던 국극단을 집으로 알고
단원을 가족삼아 자라났다. 이후 스물다섯무렵까지 10여년간 박씨는 햇님
여성국극단 송죽여성국극단 진경여성국극단등 단체를 옮겨다니며 유랑
생활을 했다. 장구도 치고 아쟁반주도 하고 태평소시나위도 자주 했다.

"화랑여성국극단에 있던 열일곱살 무렵이었지요. 누가 녹음기를 들고와
태평소시나위를 틀었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좋을수 없었어요. 명인의
연주가 이런 것이구나 했지요"

그 연주는 가끔씩 국극단에 찾아와 단원들에게 새작품도 가르쳐주고
연주도 해주던 한일섭선생(1929~73)의 태평소 시나위였다. 평소 가락
꾸미기를 좋아해 여성단원들의 소리를 들을때마다 외워두었다가 아쟁
가락으로 옮기곤 해서 만든 자신의 아쟁산조 15분짜리가 완성됐을 때였다.
음악에 대한 눈이 트이는 경험이었다.

그가 서울 익선동 한선생의 집을 찾은것은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65년
무렵이었다. 박씨의 내력을 들은 한선생은 곧바로 그에게 "선생이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 불러라"며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백부가 운영했던
아성창극단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박씨는 한선생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아쟁산조를 선보였다. "잘탄다. 맛도 있다. 그러나 두서가 없다"는게
선생의 평가였다.

"선생님밑에 5,6년간 있으면서 아쟁산조의 진정한 맛을 알았습니다.
아쟁뿐아니라 태평소 장구등 민속악기를 선생께 배웠죠" 10여년간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배운 민속악기의 실력에 음악성이 더해져 이후 박씨는 민속악기
전반에 통달한 명인이란 소리를 듣게된다.

"아쟁산조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지만 실지로 조직적으로 짜여진 것은
한선생에게서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죠. 한선생의 산조는 10~12분짜리로
우조풍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저는 여기에 계면조를 가미해 슬픈가락을
많이 넣었지요. 제것은 한 30분 정도 되지요"

정악과 민속악 공연 양쪽에서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악기가 아쟁이다.
그러나 아쟁분야는 아직까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돼있지 않다. 한일섭
선생의 경우도 신청만 됐을뿐 심사도 못받고 사망하고 말았다.

"국악의해를 맞아 국악의 각 분야가 고루 한번 정비되는 계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아쟁 태평소등 몇몇 악기는 문화재지정이 돼있지 않아 학생들이
평생을 걸고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대학만 가면 끝이라는 얘기죠"

"예술가가 돈을 알고 세상에 밝으면 좋은 음악을 할 수 없다"고 믿고있는
그는 81년 국립국악원 민속연주단에 입단할 때 산 작은 연립주택에 지금도
그대로 살고 있다. 명인이란 말을 부담스러워하고 "나이가 들수록 무대에
서기가 겁난다"고 말하는 그에게서는 어린시절 한의 상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67년에 같이 가정을 꾸민 이양임씨(45)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아들과 둘째딸은 각각 서울예전과 한양대국악과에서 아쟁을 전공해
아버지의 뒤를 잇고있다.

<권영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