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창] (8) 남도민요 박양덕씨 .. 40년 국악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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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속이요 이것저것이
꿈이로다. 꿈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나는 인생. 두어라 깨려는 꿈,꿈은 꾸어서 무엇하리"(흥타령 중)
남도민요의 소리는 구슬프다. 계면조 중에서도 가장 슬픈 느낌을 주는
진계면조를 많이 쓴다. "떠는 목"으로 시작해 "평으로 내는 목" "꺾는 목"
으로 넘어가며 이별과 죽음과 한탄의 사연을 전한다.
"눈물 보따리"소리를 내며 꺾어지지만 그 슬픔은 결코 절망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헤어지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희망의 눈물이다. 고통을
이겨낸 인고의 슬픔이다.
남도민요는 민간에 흘러다니는 민요들을 판소리꾼들이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시킨 것.
판소리와 시나위의 영향이 많아 극적구성이 뛰어나고 소리가 진득한 것이
다른 지역 민요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가사는 초탈의 도가적 정서가 드러나는 "흥타령"에서 보듯 문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남도민요는 판소리창자들이 양념으로 부르는 "쉬운
노래"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 판소리라는 대표적인 양식이 워낙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어 경기민요와 달리 국악의 한 장르로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
명창 박양덕씨(47)는 남도민요에 남달리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회만 있으면 여러 자리에서 남도민요의 중요성을 소리높여 주장하고
있다. "인간문화재 되고 싶어 그러느냐"는 남들의 비아냥도 개의치 않는다.
남도민요를 지금처럼 계속 판소리서자취급하면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보렴" "화초사거리" "새타령" "개고리타령" "진도아리랑"등 주옥같은
소리들이 곧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서다.
"판소리에 비해 민요는 맛이 있지요. 민요라는 글자 그대로 일반 백성들의
정서를 반영한 만큼 즐겁고 슬픈 것이 확실하게 표현됩니다. 한마디로 감칠
맛이 있지요" 박씨의 본바탕은 다른 남도민요소리꾼들과 마찬가지로
판소리다.
12남매 중에 다섯째로 태어난 박씨는 피리와 대금을 좋아했던 부친의
권유로 열살무렵부터 국악을 배웠다. 김연수명창의 첫스승으로 알려진
박봉선선생에게 처음 판소리를 배웠다.
"선생님이 20리 밖에 사셔서 집에 모셨지요. 다른 아이들 서너명과 함께
"적벽가"를 배웠습니다" 30리 자기땅을 밟고 다녔다는 조부이래 부자로
알려진 집안에서 자랐다. 김연수선생이 데리러 오겠다던 약속이 무산되고
정응민선생(조상현명창의 스승)에게 배우는 일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여의치
않게되자 박씨는 열네살의 어린나이에 신신국극단에 들어가 전국을 유랑하는
단체생활을 시작했다. 햇님국극단으로 옮겨 활동할 무렵 부군 김무길씨를
만났고 65년 함께 김소희명창을 찾아 상경했다.
이후 김선생에게 "춘향전"을 배웠고 80년엔 성우향선생에게 "심청전",
85년부터는 남해성선생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87년엔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90년 전국국악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 93년 KBS국악대상
에서 민요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남해성선생 문하의 "수궁가" 이수자이다.
그가 남도민요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년전. 김소희선생에게
사사하던 60년대 중반 김선생의 동생인 명창 김경희선생에게 팔도민요를
배웠다.
"판소리명창이었지만 갑상선병을 앓아 목이 다치신 분이었어요. 중국노래
일본노래도 자주 흉내내시는 등 다재다능하셨지요. 특히 팔도민요에 능통
했고 무대에서도 주로 민요만 불렀습니다" 박씨는 팔도민요를 두루 배운 탓
에 80년대 이후 "민요좀 가르쳐달라"는 후배들이 많아져 할 수 없이 남도
민요쪽 활동을 더 많이 하게 됐다. 82년 공간사랑에서 신영희 김경희 안숙선
김동애 유수정씨등과 함께 5일간 "민요발표회"를 가진 이후 남도민요의
보급과 대중화에 진력하고 있다.
"경기민요는 고운 소리가 특징입니다. 남도민요는 이쁜 목을 쓰지
않습니다" 굵은 목을 눌러내는 판소리적 발성법이 특징인 남도민요에서
박씨는 특히 목을 떨어 소리내는 농음과 꺾는 소리가 일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공연 때 선생님들이 판소리를 하시면 아랫사람들은 당연히 남도민요를
불러야 합니다. 전승과 보존을 위해서는 남도민요도 한 장르로 인정받아야
하고 대학에도 전공이 개설돼야합니다"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신쾌동류
거문고산조 이수자)와 스무살 때 이룬 가정에는 국악의 향기가 가득하다.
딸은 중앙대에서 거문고, 아들은 서울국악예고에서 아쟁을 전공하고 있다.
"시키지 않았는데 절로 그렇게 되더라"며 박씨는 활짝 웃는다.
<권녕설기자>
꿈이로다. 꿈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 나는 인생. 두어라 깨려는 꿈,꿈은 꾸어서 무엇하리"(흥타령 중)
남도민요의 소리는 구슬프다. 계면조 중에서도 가장 슬픈 느낌을 주는
진계면조를 많이 쓴다. "떠는 목"으로 시작해 "평으로 내는 목" "꺾는 목"
으로 넘어가며 이별과 죽음과 한탄의 사연을 전한다.
"눈물 보따리"소리를 내며 꺾어지지만 그 슬픔은 결코 절망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헤어지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희망의 눈물이다. 고통을
이겨낸 인고의 슬픔이다.
남도민요는 민간에 흘러다니는 민요들을 판소리꾼들이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시킨 것.
판소리와 시나위의 영향이 많아 극적구성이 뛰어나고 소리가 진득한 것이
다른 지역 민요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가사는 초탈의 도가적 정서가 드러나는 "흥타령"에서 보듯 문학적 깊이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남도민요는 판소리창자들이 양념으로 부르는 "쉬운
노래"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 판소리라는 대표적인 양식이 워낙
뿌리를 든든히 내리고 있어 경기민요와 달리 국악의 한 장르로 제대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
명창 박양덕씨(47)는 남도민요에 남달리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기회만 있으면 여러 자리에서 남도민요의 중요성을 소리높여 주장하고
있다. "인간문화재 되고 싶어 그러느냐"는 남들의 비아냥도 개의치 않는다.
남도민요를 지금처럼 계속 판소리서자취급하면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보렴" "화초사거리" "새타령" "개고리타령" "진도아리랑"등 주옥같은
소리들이 곧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서다.
"판소리에 비해 민요는 맛이 있지요. 민요라는 글자 그대로 일반 백성들의
정서를 반영한 만큼 즐겁고 슬픈 것이 확실하게 표현됩니다. 한마디로 감칠
맛이 있지요" 박씨의 본바탕은 다른 남도민요소리꾼들과 마찬가지로
판소리다.
12남매 중에 다섯째로 태어난 박씨는 피리와 대금을 좋아했던 부친의
권유로 열살무렵부터 국악을 배웠다. 김연수명창의 첫스승으로 알려진
박봉선선생에게 처음 판소리를 배웠다.
"선생님이 20리 밖에 사셔서 집에 모셨지요. 다른 아이들 서너명과 함께
"적벽가"를 배웠습니다" 30리 자기땅을 밟고 다녔다는 조부이래 부자로
알려진 집안에서 자랐다. 김연수선생이 데리러 오겠다던 약속이 무산되고
정응민선생(조상현명창의 스승)에게 배우는 일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여의치
않게되자 박씨는 열네살의 어린나이에 신신국극단에 들어가 전국을 유랑하는
단체생활을 시작했다. 햇님국극단으로 옮겨 활동할 무렵 부군 김무길씨를
만났고 65년 함께 김소희명창을 찾아 상경했다.
이후 김선생에게 "춘향전"을 배웠고 80년엔 성우향선생에게 "심청전",
85년부터는 남해성선생에게 "수궁가"를 배웠다. 87년엔 "수궁가" 완창
발표회를 가졌다. 90년 전국국악명창대회에서 대통령상, 93년 KBS국악대상
에서 민요대상을 수상했다. 현재 남해성선생 문하의 "수궁가" 이수자이다.
그가 남도민요와 정식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년전. 김소희선생에게
사사하던 60년대 중반 김선생의 동생인 명창 김경희선생에게 팔도민요를
배웠다.
"판소리명창이었지만 갑상선병을 앓아 목이 다치신 분이었어요. 중국노래
일본노래도 자주 흉내내시는 등 다재다능하셨지요. 특히 팔도민요에 능통
했고 무대에서도 주로 민요만 불렀습니다" 박씨는 팔도민요를 두루 배운 탓
에 80년대 이후 "민요좀 가르쳐달라"는 후배들이 많아져 할 수 없이 남도
민요쪽 활동을 더 많이 하게 됐다. 82년 공간사랑에서 신영희 김경희 안숙선
김동애 유수정씨등과 함께 5일간 "민요발표회"를 가진 이후 남도민요의
보급과 대중화에 진력하고 있다.
"경기민요는 고운 소리가 특징입니다. 남도민요는 이쁜 목을 쓰지
않습니다" 굵은 목을 눌러내는 판소리적 발성법이 특징인 남도민요에서
박씨는 특히 목을 떨어 소리내는 농음과 꺾는 소리가 일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공연 때 선생님들이 판소리를 하시면 아랫사람들은 당연히 남도민요를
불러야 합니다. 전승과 보존을 위해서는 남도민요도 한 장르로 인정받아야
하고 대학에도 전공이 개설돼야합니다"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신쾌동류
거문고산조 이수자)와 스무살 때 이룬 가정에는 국악의 향기가 가득하다.
딸은 중앙대에서 거문고, 아들은 서울국악예고에서 아쟁을 전공하고 있다.
"시키지 않았는데 절로 그렇게 되더라"며 박씨는 활짝 웃는다.
<권녕설기자>